“사회복지학과를 나왔으나 타 종교기관에서 복지 관련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교 안에서 사회복지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자원봉사로 시작한 불교복지종단 차원 복지재단 설립까지이제 정신적 복지로 나아가야당당히 포부를 밝혔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스님께서 “사회복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고아 등 오갈 곳 없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사회복지라 말씀드렸다. 그런 일이라면 당장 해야 하지만 그와 관련한 부서는 없다고 했다. “스님 제가 하겠습니다. 자원봉사라도 좋습니다.”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드셨는지
출가 인연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며느리도 절에서 찾으셨다. 집안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갑작스레 장애가 생긴 아버지를 잘 보듬어 줄 수 있는 신심 깊은 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스님의 유발상좌였던 어머니 뱃속에 서 세상으로 나왔다. 절간 같았던 집안 분위기스님 권유로 복지과 진학불교복지 실천 원력 세워집안은 마치 절집 같았다. 집안 어르신들의 반듯한 위의, 검박한 생활 속에 녹아있는 부처님 가르침을 보고 자랐다. 걷기 전에는 어머니 등에 업혀 그 후엔 어머니 손을 잡고 수없이 절에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1학년 때 나
서울 길상사에 둥지를 틀게 됐다. ‘청년불교 우리사랑’이 맺어준 인연이기도 했다. 2010년 법정 스님이 설립한 ‘맑고향기롭게’에서 기획실장 소임을 맡았다. 능인선원 때처럼 3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글 쓸 줄 알고 편집능력 있어야 했다. 홈페이지 관리는 물론 수행 경험은 필수였다.군포교하며 큰 보람 느껴전문포교사로 전법 재출발육자명호 염불하면서 정진당시 옷 안쪽 주머니에 항상 ‘금강경’을 넣고 다녔다. 1979년 정음사서 출간한 문고판인데 신림동 헌책방에서 500원에 구입해 수년째 읽었다. 1년 내내 넣고 다니며 출퇴근 등 시간 날
“아이를 절에 파시지요.”관음사 어린이법회로 불연‘사이버 신행단체’ 운영도능인선원 IT관리자로 첫발어머니는 탁발 오신 스님들께 가끔 이런 말을 들었단다. 불연이 지중했음을 직감했는지 어머니는 과감한 행동을 보이시기도 했다. 실제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해남 시골 어느 절에 아들을 팔러(?) 가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기는 하룻밤 해프닝이었지만 잊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 인연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50살이 넘도록 불교에 푹 빠져 살고 있으니 말이다. 본의 아니게 템플스테이를 경험한 다음 해엔 제 발로 절에 갔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캄보디아아동센터 시작으로교육·지역개발 인프라 구축미얀마·라오스 등지로 확대조선대 선배로 1979년 입학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장을 역임하고, 1980년 5월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의해 산화한 지광 김동수 열사의 비에 새겨진 문구다. 김동수 열사의 이 말은 내 삶의 좌우명이 되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항상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2004년 모든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간다는 목표 아래 사단법인 로터스월드는 출범했다.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4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학진학의 꿈이 좌절되자 아버지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해남 대흥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 스님의 권유로 출가했으나 이를 알게 된 할아버지가 장자라는 이유로 출가한 아버지를 강제로 환속시켰다. 이후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그 덕에 나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러한 연유로 불교는 어려서부터 나에게 생활 그 자체가 됐다.출가했던 아버지 덕분에자연스럽게 불자로 성장로터스월드서 비전
1994년 8월 조계종 총무원 호법주임으로 종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조계종은 변혁의 시기였다. 종단개혁을 통해 종단 안팎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내가 근무한 호법부는 범계행위를 저지른 스님을 조사해 징계에 회부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종무원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범계행위를 저지른 스님들을 조사할 때면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스님에 대한 경외심은 점점 옅어졌다. 그럴수록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적지 않았다. 진로에 대해 고민
어떤 인연이었을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조계종 총무원에서 종무원으로 근무하게 될지는 생각도 못했다.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닌 적은 있지만 남들처럼 학창시절 신행활동을 해본 기억은 없었다. 불교는 그냥 친숙한 종교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20년 넘게 불교 일을하게 된 인연의 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민주화운동 가담총무원 입사는 삶의 전환점사실 불교와 인연을 맺을 기회는 앞서 몇 차례 더 있었다.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1985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 상경했다. 낯선
사회복지법인 송광 정심원은 1984년 1월 법인 설립에 이어 보건복지부로부터 정신요양시설 설치운영 허가를 받아 운영을 시작했다. 불교법인으로 거듭난 것은 2005년 6월 도영 스님이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다. 서원노인복지관이 말 그대로 노인복지를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정심원은 정신질환자 230여명을 대상으로 24시간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생활시설이다.전북에서 청년불자 찾기 힘들어불교복지시설 만드는 게 해결책서원노인복지관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근무할 수 있었지만, 정신질환자들은 모든 게 생소하고 힘들었다. 특히 드라마나 영
1998년 초여름 문턱이었던 것 같다. 기업을 대상으로 초고속인터넷 임대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던 당시,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러던 중 김제 금산사에서 종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고향친구를 만났다. 불교와 인연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금산사 입구서부터 왜인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날 친구로부터 불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을 수련하는 수행의 종교라는 말이 와닿았다. 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바로 이때였다.회사 이익 위해 살며 심신황폐봉사 결심하고 노인
1998년 10명의 멤버와 함께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 개관을 준비했다.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장애인 이용자들이 가장 편하게 복지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건물의 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건축상 변경하기 어려운 곳은 일일이 동선을 확인하며 칸막이 등을 사용해 공간을 마련했다. 커튼 색과 식판의 모양부터 운영프로그램까지 함께 논의하며 장애인 이용자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1998년 4월 불교계 최초 장애인 복지관이 개관됐다. 지속적인 노력 성과로 나타나조계사서 명상으로 하루 정리사회복지가 처음인 만큼 ‘모른다’를
“박 선생! 이리 와봐” 찬불가 통해 불법 가슴에 새겨스님 권유로 사회복지 길 걸어어르신이 부르는 소리에 다가가보니 바지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주신다. 받아든 사탕은 더운 날씨에 녹아 비닐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비닐을 벗겨 입안에 사탕을 넣었다. “어르신, 사탕이 참 맛있어요.”나를 보는 어르신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입안의 사탕과 함께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가 녹는다. 복지관을 이용하는 분들의 작은 마음이 전해질 때면 쌓였던 피로는 싹 풀리고 만다. 나는 불교계 첫 장애인복지시설인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일하고 있
조계종 문화부에서 내가 맡은 일은 불교중앙박물관 건립 불사로, 종무원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다. 2009년에는 문화부 팀장을 맡게 됐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소임이었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계획해왔던 것들을 추진했다. 앞서 조계종 입사 즈음에 직원들과 문화부 로드맵을 작성했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부를 중심으로, 연구·조사를 담당하는 발굴조사단과 가장 앞서서 사람들과 만나고 홍보하는 박물관, 그리고 문화재 자체에 대한 보존처리를 이행할 불교유산보존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것이었다.불교유산보존센터 예산 확보방재시스템 도입 등에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로소 진짜 부처님을 만났다. 경남 마산의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절을 드나들긴 했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울산으로 이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친구의 권유로 동축사를 찾았다. 무상과 무아,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종범 스님이 쓴 ‘불교를 알기 쉽게’를 읽으며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내 삶의 방향은 그때 결정됐고, 지금껏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
변해가는 종단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매일 108배를 올리면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내 삶 속으로 체화하고자 노력했다. 수차례 3000배에 도전하고, 참선공부도 체계적으로 이어갔다. 참선입문프로그램, 심화과정프로그램을 거쳐 조계사에서 참선대학원 과정으로 운영하던 ‘선림원’ 2년 과정도 수료했다. 고우 스님과 적명 스님 등 큰스님들의 강의를 듣고 봉암사 참선수련도 참가했으며, ‘이뭣고’ 화두를 들며 나를 찾고자 정진하고 있다.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 전 조계사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고 잠시라도
대학 졸업 후 일하게 된 첫 직장부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언제나 부처님의 그늘에서 살아왔다. 불교는 곧 내 삶의 지표였고 신앙이자 인생의 터전이었다. 종립학교 불교부서 신심 키워대학 시절부턴 불교 활동가로불교와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시작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매월 음력 초삼일에는 빠짐없이 정성스레 떡을 해 초를 켜고 기도를 하셨다. 매 순간 불제자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일상 속 불교를 일깨워줬다. 인연인 듯 종립학교인 동국대 사범대
대학을 졸업해서도 불연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불교신문사에서 사람을 구했다. 당시 대표가 혜총 스님이다. 6개월 정도 기자생활을 했다. 그러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포교원이 매월 간행하는 ‘법회와 설법’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이다. 포교연구실서 포교 청사진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들어진 월간지였다. 재가종무원으로 20년째 근무‘금강경’ 제법무아 실천 발원‘법회와 설법’은 매달 설법문안 3가지와 특별법회 진행 매뉴얼, 각종 발원문 등 포교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2010년 ‘웹진 법회와 설법’으로 전환됐고, 이후 ‘개
부처님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 전환점일지 모른다. 내 인생에서 굳이 꼽자면 그런 전환점이 3번 있었다. 고등학교 불교학생회, 5·3인천사태, 평화리더십아카데미라고 말할 수 있다. 80~90년대 자주화운동 매진아르바이트로 포교원 업무김제에서 태어났지만 전주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1학년 학기 초, 그러니까 봄이었다. 각 서클에서 신입부원을 모집했는데, 칠판에 ‘불(佛)’자 하나 써 놓은 선배들이 있었다. 종교에 관심 없던 때였다. 좌담회가 있다는 설명에 끌렸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고치고
1993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이하 대불어) 산하 어린이불교교육연구소 직원으로 불교활동가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한 스님의 요청을 받아 대전의 어린이집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도반 이동원 거사와 결혼해 첫 아이를 낳으면서 잠시 활동가의 삶을 접었다. 이후 대불어의 제안으로 사무국장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어린이 포교를 위한 실무자 역할을 지속했다. 찬불동요대회를 만들고, 불교학교를 개최하고,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등 천진불들을 위한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대불어 주요 사업인 전국어린이지도자연수회가 열리
사촌고모가 절을 창건할 정도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심이 깊었다. 모두가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자연스레 부산 남포동 대각사 고등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불교활동을 시작했다. 대각사 어린이법회 맡으며기타 배워 어린이들 지도당시 대각사 법회는 또래들에게 인기였다. 친구들과 만나 노래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던 선배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내가 어린이법회 지도법사가 된 것은 당시 대각사 어린이법회 지도교사였던 박용하 관장 덕분이었다. 관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