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3. 그대, 안광낙지시를 보장할 그 무언가를 닦았는가?!

기자명 정운 스님

호흡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원문: 지공이 ‘세간을 초월한 명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대승의 법약을 그릇되게 복용한다’라고 하였다. 그대가 지금 일체시중 행주좌와에 무심을 배워 오랫동안 거듭하면, 힘을 조금이라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설법은 다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으로 마치 누런 잎을 황금이라고 속여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다. 결단코 실재적인 것이 없다. 만약 실재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종문의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대의 본체와 무슨 교섭이 있겠는가? 경에 ‘조그마한 법조차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아뇩보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혹 이 뜻을 알고자 한다면, 바야흐로 ‘불도(佛道)와 마도(魔道)라고 하는 것이 모두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본래 청정해 밝으며,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고, 크고 작음도 없으며, 길고 짧은 형상도 없다. 번뇌와 열반도 없으며,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분명히 보라. 한 물건도 없다.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항하사 대천세계는 바다의 물거품이며, 일체 성현은 모두 스치는 번개와 같다’고 하였다. 일체가 마음의 진실함만 같지 못하다.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처와 조사가 같거늘 어느 곳에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겠는가?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즉심시불 교화방편에 불과
밖에서 구하는 것 경책 의미
열반과 번뇌가 하나이기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해설: ‘세간을 초월한 명사’란 명안종사(明眼宗師), 벽안의 스승을 말한다. 위빠사나이든 간화선 수행이든 스승과의 인연이 매우 중요하다. 깨달음에 있어 스승의 역할도 크지만 제자의 구도심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선에서 발초첨풍(撥草瞻風)이라는 말이 있다. 수행자들이 스승을 찾아 ‘풀을 헤치고, 바람을 거슬러 맞으며 스승을 찾아 나선다’는 뜻으로 힘든 고난을 헤쳐가며 선지식을 찾는 것을 말한다. 조동종의 종조 동산 양개(807~869)의 선풍에서 비롯되었다. 

원문에서 지공(418∼514)은 달마가 중국에 도래하기 이전 선자이다. 중국에서 선종이 형성되기 이전, 중국민족 자신에 의한 새로운 종교철학이 있었는데, 위진남북조 시대에 청담과 현학이라 불리는 사상운동으로 나타났다. 지공은 계율로부터 초월해 형식적인 선의 관습을 배척하고, 무애행(無碍行)이나 무집착 등 전형적인 자유로움을 드러낸 선사이다.

원문에서 ‘누런 잎을 황금이라고 하면서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라는 부분을 보자. 이 내용은 ‘열반경 영아행품’에 전한다. 황엽지제전(黃葉止啼錢)이라고 하여 선에서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 방편 쓰는 것을 비유하였다. 이 비유는 마조의 기록[전등록]에 등장한다. 어느 승려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설하십니까?”
“어린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다.”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낙엽을 반짝거리게 해서 황금이라고 속이는 것이다. 맨주먹을 보이며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울음을 그친 아이에게는 황엽의 지제전은 필요 없다. 마조는 또 그런 사람을 위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설한다. 곧 ‘즉심시불’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것이요, 울기 때문에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기는 원래 착한 아이도 나쁜 아이도 아닌, 단지 아기일 뿐이다. 실은 상대가 울지 않으면 ‘아가야! 너는 착한 아이다’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즉심시불이니 비심비불이니 하는 따위의 언설에 집착하지 말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진실한 부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원문에서 ‘실로 조그마한 얻을 법이 없는 것을 아뇩보리라고 한다’라는 부분을 보자. 이 내용은 ‘금강경’ 22품에 ‘실로 조그마한 얻을 법이 없는 것을 최상의 정각[無有少法可得 是名阿?多羅三?三菩提]’이라고 하였다. 어떤 것에 국한되거나 집착되지 아니하고, 한 물건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으며, 어떤 것이 최상의 법이라는 분별심조차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기 때문에 열반과 번뇌가 하나이며, 부처와 중생이 곧 하나인 불이(不二) 경지이다.

원문에서 ‘이번 생을 마칠 즈음, 숨을 내쉬고 어찌 숨을 들이쉴 수 있는 보장이 있겠는가?’ 생명의 유한함을 말한다. 호흡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