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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귀향, 혹은 부모도 태어나기 전 고향에 대하여-상

고향은 그곳을 떠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향수

▲ ‘본래면목(本來面目)’고윤숙 화가

‘고향’이란, 지금도 귀향을 하게 하는 어떤 힘, 흔히 ‘그리움’이나 ‘정겨움’ 같은 것과 결부된 분위기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그래서 태어난 곳을 지칭하는 ‘본적지’라는 행정적 단어와 달리 고향은, 딱히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조차 그리움의 뉘앙스를 갖고 사용한다. 끔찍한 체증의 고통을 견디며 해야 할 ‘일’이 된 ‘귀성’ 내지 ‘귀향’조차 긍정적 어감을 갖는 것이 이 때문일 게다. 그러나 고향에서 그리움이나 정겨움을 느꼈을 사람은 거기 사는 이들이 아니라 거기를 떠난 이들이었을 터이다. 마치 어느 산골에서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곳에 사는 이가 아니라 외지인이었듯이. 거기 사는 이들에게 그곳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환경(surrounding)일 뿐이다. 거기 사는 이들에게 고향은, 만약 그곳이 깊은 시골이었다면 더 그럴 터인데, 정겨운 곳이라기보다는 떠나고 싶은 곳일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위해, 어쩌면 실패로 끝날 꿈을 위해 떠나고 싶은 곳.

고향은 근대화 초기 도시가 만들어 낸 것
물 떠난 뒤 물고기가 비로소 물을 느끼듯
나를 존재자로 살게 해주는 존재가 고향

고향에 그리움이나 정겨움이란 뉘앙스가 바싹 달라붙은 것은 필경 근대화 초기, 혹은 자본주의 초기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종종 수행이나 여행, 순례나 방랑 등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들은 있었지만 대개는 소수의 예외에 불과했다. 더구나 농민들은 토지에 매인 존재여서, 자신이 태어난 땅을 대개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토지를 떠난다는 것은 유랑민 내지 부랑자가 되어 떠도는 삶 속으로 들어감을 뜻했다. 중세도시는 그렇게 토지를 버리고 도망친 이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었다. 근대화 초기의 대도시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힘들 때면 떠나온 곳의 풍경이 정겹고 그립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고향’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고향’이란 농촌이 아니라 도시가 만들어낸 것이다.

고향상실의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명확하고 강렬한 문제의식을 표명했던 것은 하이데거였다. 그는 철학이란 그런 향수에 사로잡힌 기분 속에서 하는 것이라고, 그런 기분에 의해 사유의 방향을 잡는 것이라고 단언한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인간이란 고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라고 하지만, 그에게 세계란 무엇보다 고향을 뜻한다. 마치 물고기의 물과 같아 있을 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상실의 사태에 직면해서야 그것이 있었음을, 그러나 상실되었음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게 바로 고향이다. 그가 말하는 ‘존재’란 이처럼 내가 존재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물이나 대기 같은 것이다. 나중에 가선 그것을 나를 둘러싼 세계, 내 머리 위에 펼쳐진 대기와 하늘, 내가 발 딛고 사는 대지,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이 모여들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하늘과 대지와 신,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돌보고 걱정하며 함께 거주하는 것이다(‘건립함, 거주함, 사유함’).

거주의 터전이나 장소 뿐 아니라 하나의 사물에서도 그는 이처럼 ‘사방’(하늘, 땅, 신, 인간)이 모여들어 있음을 본다. 릴케의 시에서 그는 포도주 안에는 하늘에서 내려준 비가, 그 비가 스며든 대지가, 대지에서 솟아난 샘물이, 그 샘물을 둘러싼 바위가, 그 술이 바쳐지게 될 죽은 자들이, 그리고 그것을 붓고 바치는 인간이 깃들어있음을 본다. 신에게 붓는 술에는 그렇게 사방이 하나로 포개져 머물고 있다. 사방이 서로에게 준 선사의 행위가 네 겹으로 포개져 있다(‘사물’).

이런 점에서 죽은 자나 신에게 바치는 헌주는 술집에서 마셔대는 술과 다르다. 이렇게 사방 세계가 모이며 포개어져 머물게 되는 한에서만 사물은 진정한 ‘사물’이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삶이란 하늘과 땅과 신과 인간들이 하나로 모여들어 서로를 떠받치고 걱정해주는 거주의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마치 다리가 분리된 땅을 모아주고 하늘과 강과 대지를 하나의 풍경으로 모아주며, 다리로 연결된 장소로 인간들을 모아들이듯이.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근대의 과학기술로 인해 상실된 고향을 되찾고자 한다.

노년의 하이데거가 그토록 좋아했던 시인 횔덜린의 시 ‘귀향’은 사방이 서로를 걱정하며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선사하는 이런 ‘하나된’ 고향의 모습이 확연하게 그려져 있다. 첫째 연은 먼저 하늘이 선사하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마치 중개자인 양 새가 창공에 머물러 낮을 부르면 인간들이, 인간의 마을이 깨어나 화답한다. “그곳 골짜기 깊은 마을도 이제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 없이, 지고한 것을 신뢰하면서, 정상을 우러러본다.” 2연은 여기에 대지가 응답하며 시작된다. 대지에 속하는 그 높은 봉우리의 빛 속에는 “도시마다, 가옥마다/ 진정한 축복을 선사하는” 지복의 신이 살고 있다.

이것이 고향이다. 아무 물건이나 사물이 아닌 것처럼, 고향 또한 단지 내가 태어난 곳이나 조상들이 살던 곳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사방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선사하며 어울리고 포개지는 곳을 뜻한다. “정녕 그렇다! 이곳이 출생지, 고향 땅이다.”(4연) 귀향이란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태어난 곳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사방이 서로를 걱정하며 서로에게 존재를 선사하며 모여드는 곳에 있다. “그대가 찾는 것, 그것은 가까이 있고 이미 그대와 만나고 있다.”

횔덜린은 고향이 가까이 있고 이미 우리와 만나고 있다고 하지만, 가령 서울이나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라면 어떨까? 거기에도 이미 있다고 할까? 횔덜린은 모르겠지만 하이데거가 어떻게 말할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의 초청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왜 시골에 거주해야 하는가?”라는 연설을 한다. 그 대신 숲속을 산책하며 사유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에게 대도시란 고향 아닌 곳, 고향상실의 장소일 뿐이다.

지금 한국이 그렇듯, 근대화와 공업화가 충분히 진행되면, 시골에는 적은 수의 노인들만 남게 된다. 남한 인구의 절반이 서울, 하나의 대도시에 모여 산다. 우리는 그렇게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대도시에서 자란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고향이 없다. 고향이 없으니 잃어버릴 고향도 없다. 고향상실의 분노와 향수도 없고 귀향의 소망도 없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단어 속에 남은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다. 명절이면 보게 되는 대대적인 귀성의 물결 속에서조차 정겨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의무화된 귀향이 휴가를 위한 여행으로 바뀌게 된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이다. 이런 이들에게 고향상실을 비판하며 그것의 극복을 요청하는 하이데거의 호소는 어떻게 들릴까? 현재 자신의 삶의 터전인 대도시를 떠나 시골을 찾아가란 말일까? 거기 가서 고향을 만들라는 말일까? 아니면 대도시 그 자체를 저렇게 사방이 모여들며 합일되는 거주의 장소로 만들라는 말일까? 어떤 것도 아니라면, 고향상실에서 시작하는 철학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귀향이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며, 고향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1호 / 2017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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