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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천·지·인이 빚어낸 불상들

기자명 주수완

너무 신비로워 작가 이름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불상들

▲ 문경 사불산 대승사 사면석불. 마멸이 심한 편이어서 불상의 존명 등을 밝히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사불산·굴불산·만불산’에 실린 세편의 이야기는 제목이 ‘산’자 돌림이다. 그러나 각각의 내용을 보면 등장하는 산의 개념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사불산과 굴불산은 석불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불산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린
3구의 ‘산’자 돌림 불상들

하늘에 내려보낸 ‘사불산’
땅속 있다 드러난 ‘굴불산’
신라장인이 빚은 ‘만불산’

당대 최고의 작가들 작품
신이 만든 작품으로 전해

작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신화들이 탄생

사불산은 현재의 경북 문경 공덕산에 있는 대승사라는 절에 관한 기록인데, 그곳 산 정상부에 사방불, 즉 네 면에 돌아가며 불상을 새긴 바위가 있다. 설화에 의하면 진평왕 9년(587)에 이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졌고, 진평왕은 이 소식을 듣고 몸소 사불산까지 찾아와 공양한 뒤 그 곁에 절을 세워 ‘대승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불상은 비단에 쌓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신라에 내린 선물인 셈이다. 이것이 진평왕대에 일어난 일이므로 한편으로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통치자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거나 혹은 그가 훌륭한 왕임을 하늘이 인정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었다면 기왕 내려주시는 김에 경주로 보내주셨더라면 더 자연스러웠을텐데 지방, 어찌 보면 삼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전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경으로 내려 보냈다는 것이 특이하다. 앞서 진흥왕 때에는 인도의 아쇼카 왕이 장육불상을 만들어 달라며 재료를 배에 실어 보낸 적이 있었고 진평왕은 이미 즉위하던 해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부터 옥대를 하사받은 바 있다. 만약 사불산 설화가 정말로 진평왕을 위한 것이었다면 진평왕은 유독 하늘로부터 무엇을 받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정면 삼존불 중에서 좌협시보살이 관음보살인 것으로 보아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땅속에서 들린 염불이란 ‘나무아미타불’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비록 특정 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설화는 사불산 대승사의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의 신성함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은 단지 “왕도 와서 몸소 경배하고 갔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대승사 사방여래를 더욱 존귀한 대상으로 만드는데 있어 일종의 조역처럼 느껴진다. 진평왕은 이 바위를 향해 끊임없이 ‘법화경’을 독송할 승려를 임명했는데 이를 통해 이러한 사방불 신앙이 ‘법화경’과 연관된 것이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으며, 절 이름이 대승사인 것도 대승불교 경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법화경’의 독송과 어떤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두 번째 이야기인 굴불산에 관한 설화는 경주의 북쪽에 위치한 금강산의 백률사 아래에 있는 굴불사지의 사면불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의 일인데, 경덕왕이 백률사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굴불사지를 지날 때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땅을 파보니 이번에도 사방불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상을 발굴했다고 해서 절의 이름이 ‘굴불사’가 되었다. 백률사 역시 순교자 이차돈의 목을 치자 그 목이 날아와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절이라고 하며, 또한 백률사에는 효소왕 때 오랑캐에게 붙잡혀갔던 화랑 부례랑과 안상을 신라로 되돌아오게 했던 영험한 관음상이 봉안된 곳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굴불산 설화까지 더해진 것이다.

▲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 뚜껑 세부. 만불산의 모형산과 동물들, 인물들과 음악연주상 등에 대한 묘사를 들어보면 왠지 이 향로의 산수표현이 연상된다.

결국 사불산의 사방불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굴불사의 사방불은 땅에서 솟아났으니 천지의 조화라 할만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굴불사 불상 역시 이들 불상을 신성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경덕왕은 아마 조연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러한 설화들이 언제쯤 생겨났는지가 궁금하다. 실제 진평왕과 경덕왕 때에 이러한 설화들이 생겨났고 불상도 이때 만들어졌을까? 미술사학자들은 이들 왕들의 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면 아마 설화들은 훨씬 나중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만약 설화가 실제 이들 왕들 때 만들어졌다면 불상들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어야 한다. 새로 막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불상보다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던 불상들에 이런 설화가 더 쉽게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설화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바로 미술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그러나 대부분 무심하게 지나가버리는 이들 불상을 만든 작가의 시각이다. 이러한 설화들을 통해 불상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즘 인문학에서 그렇게도 강조하는 콘텐츠적 측면에서 보자면 더더욱 배울 점이 많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힘들여 조각가가 깎아두었더니 사람들이 이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지 않고 신이 만든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신이 만들었다고 볼 정도로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일면 칭찬의 뜻으로도 들린다. 그러나 “신이 만든 작품 같다”와 “신이 만들었다”는 얘기는 차원이 다르다. 정말로 신이 만들었다고 해버리면 결국 작가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결국 이러한 설화는 철저한 익명성이 요구된다. 즉 신이 만든 것이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인 조각가는 철저히 숨겨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각가가 바랐던 것일까?

▲ 수미산을 형상화한 티베트의 금공품. 만불산은 자연스러운 산의 모습이었겠지만 아마 비슷한 개념으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서양조각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 작품이 너무 훌륭하여 고대의 작품을 발굴해서 가져다 놓은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피에타가 자신의 작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불산, 굴불산의 석불상들을 조각한 작가들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가 누구인지 전해지고 있었지만, 작품인 불상을 신성화하기 위해 작가의 존재는 슬그머니 숨겼을 수 있다. 아니면 원래 우리의 석공들은 그렇게 이름도 남기지 않고 일하다 가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고, 그 후의 빈자리에 신화가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작가들의 익명성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화는 결코 작품에 스며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희생하는 대신 그들의 작품을 신들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최소한 굴불사의 사면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신의 솜씨가 아닌가 싶게 마치 화강암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녹여서 부어낸 것처럼 부드럽고 정교하다.

세 번째 만불산은 실제의 산이 아니다. 만불산은 중국 황제 대종이 불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경덕왕이 선물로 주기 위해 신라 장인들의 정수를 담아 만든 일종의 정밀기계 공예품이었다. 별의별 정교한 것을 다 만들어내는 중국의 황제조차도 이를 보고 “신이 만든 것 같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비록 신의 기교를 빌려 찬탄하긴 했지만 여기에는 그 어떤 신화도 없다. 오직 인간의 치열한 기술이 이루어낸 성과를 다루고 있다. 만불산의 생김새는 두꺼운 오색 양탄자 위에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모형의 산을 만들고 그 위에 크기 2~3㎝ 정도의 불상 1만구를 봉안했는데 그렇게 작은데도 머리카락과 두 눈 사이의 백호가 정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산 곳곳에 벌, 나비, 제비, 참새 등의 형상이 있어 작은 바람에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이며 움직였고, 화려한 모형 전각들에는 종이 달려있는 것도 있었는데 여기서 종이 울리면 곳곳에 배치된 승려상들이 엎드려 절하고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마도 모종의 기계장치로 인해 움직이는 미니어처 정원을 만들어내었던 것 같다.

▲ 기계장치로 움직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불산도 아마 조선시대의 이 자격루처럼 작동하는 원리였을 것이다.

비록 만불산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궁박물관에 재현된 조선시대의 자격루를 보면 흐르는 물을 동력으로 사용하여 이러한 기계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거기다 산의 형세와 그 곳곳에 불상과 승상, 동물상을 배치했다는 기록은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를 떠올리게 한다. 이 향로의 다양한 조각상들을 자격루의 기계장치로 움직이게 만든다면 아마도 만불산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이런 신기한 초정밀 기계장치인 만불산은 그야말로 몇 안 되는 이 시대 최고의 시계회사만 만들 수 있다는 정밀장치인 뚜르비옹의 신라 버전이었다.

이를 선물받은 대종은 이를 내불당에 안치하고 금강계 밀교의 고승 불공 삼장을 초청하여 그 앞에서 밀교 경전을 낭송하게 하였다 하니, 왠지 사불산의 사방여래 앞에서 ‘법화경’을 외우게 했던 것과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 그렇다면 만불산은 밀교와 연관이 있는 산이었을까? 때문에 혹 이 만불산은 경덕왕이 중국 불교의 성지인 산서성 오대산을 미니어처화해서 선물로 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한다. 예를 들어 대종이 늘 오대산을 참배하고 싶었으나 황제로서 밖으로 나다니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안에 앉아 오대산을 순례해 보시라는 뜻으로 경덕왕이 보낸 꽤 센스 있는 선물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기에 오대산과 인연이 있는 당시의 고승 불공을 모셔다 밀교진언을 염불공양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 돈황 막고굴의 오대산도. 당나라의 오대산 신앙을 반영하는 그림이다. 만불산은 이러한 오대산도의 축소실사판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참고로 더 특기할만한 사실은 당시 불공 삼장의 문하에서는 신라의 혜초 스님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공 삼장이 만불산을 향해 염불을 하고 있을 때 그를 따랐던 제자들 가운데 어쩌면 혜초 스님도 함께 했을지 모른다. 불공 삼장이 혜초 스님께 “그대의 고향에서 온 것이다”며 추켜세웠을 때 으쓱했을 혜초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연 스님은 찬하여 말하길 “하늘은 만월을 단장시켜 사방불을 깎아냈고/땅에선 백호가 솟아나 하룻밤에 열렸네/묘수를 다시 움직여 만불을 새기니/진풍이 삼재(三才)로 두루 펼쳐지네”라고 읊었다. 즉, 사불산은 하늘, 굴불산은 땅이 드러낸 조화라면 만불산은 인간의 조화이므로 결국 천·지·인 삼재가 각각 빚어낸 산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낸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낸 일연 스님의 이야기꾼 기질이 진정 놀랍기만 하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11호 / 2017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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