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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참다운 자유는 무엇인가?

기자명 정운 스님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 이가 자재인

원문: 배휴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황벽이 말했다. “하루 종일 밥을 먹지만 한 톨의 쌀도 씹지 않으며, 하루 종일 걷지만 한 평도 밟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인상·아상 등이 없으며, 하루 종일 일체의 모든 일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 자를 ‘자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어느 시간 순간순간마다 일체 모습을 보지 않고, 전후 삼제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머물러 있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편안하게 단정히 앉아 임운에 구속됨이 없어야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종문의 천명·만명 가운데 다만 3∼5명이 얻을 뿐이다. 만약 장차 이 일을 반드시 마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알라. 이번 생에 힘을 다해서 일을 마쳐라. 누가 여러 겁 동안 나머지 괴로움을 받아야 하는가?

누굴 만나든 상대에 집착 않고
걸림 없는 경지에 머무는 사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바로 이런 경지가 참다운 자유

해설: 원문에서 ‘계급에 떨어지지…’는 불교학에서 전형적으로 정해놓은 불교의 수행 과위가 있지만, 여기에 구애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수행 과위로 초기불교에서는 4과를 말하고, ‘화엄경’에서는 52위(位)로 나누며, ‘유가론’에서는 42위 등 수행 과위로 나뉜다. 그런데 황벽 사상[조사선]에서는 돈법적(頓法的)인 측면이므로 수행 과위에 걸림 없는 경지를 말한다. 원문에서 나왔듯이 ‘실로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이 무상정등각’이라고 했건만 어떤 계위에 떨어질 것이 있겠는가?

이어 ‘모든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 자인 자재인’은 어떤 사람을 만나든 상대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든 걸림 없는 경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시·공간적으로 머물러 있는 곳에서 걸림 없는 무주심·무심의 상태를 말한다. 당나라 때 대주 혜해는 원율사가 “화상께서는 도를 닦을 때 공력을 들입니까?”라고 묻자,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곧 잠잔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경지가 자유다. 새가 날고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해탈하였어도 ‘수행했다’ ‘깨달았다’는 관념조차 없는 경지에 머물러 행동하는 자를 진정한 자유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대목에서 과거·현재·미래는 전제·중제·후제와 같은 의미다. 아함부 ‘일야현자경’에 ‘과거를 쫓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염려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하라’는 구절이 있다. 곧 현재 시점에 머물러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차원이 조금 다르다.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것도 이름 붙인 것일 뿐 시제는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다. 어느 시간, 어느 마음이 ‘참 마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듯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시간적인 정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현재라고 하는 것 또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앞의 한 생각이 흘러갔으나 뒤의 한 생각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이 중간이 바로 현재의 생각이다. 그런데 현재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중간의 공백을 삼제탁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종문의 천명·만명 가운데 다만 3∼5명이 얻을 뿐이다’는 부분에 한동안 마음이 꽂혀 있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 교단이 형성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神)이 아닌 스승과 같은 존재였던지라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수행의 종교이다. 정진의 의미를 새기고 새겨야 종단도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반드시 마치지 못한다면…’은 도대체 무슨 일을 마친다는 의미겠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방거사의 시를 보자. “마음이 그렇듯이 경계도 그러하여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유(有)에도 관여하지 않고 무(無)에도 또한 머물지 않으니 이는 성현이 아니요, 일을 마친 범부일 뿐이다.” ‘일을 마친다’는 것은 모든 분별심과 집착이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러니 깨닫지 못하면, 끝없는 고해에 윤회해서 고통 받게 된다는 황벽의 간절한 노파심이 담겨 있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1호 / 2017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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