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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공자를 만난 석가와 예수

기자명 조정육

“어떤 훌륭한 논리도 사람 도리는 못 넘어”

▲ 정희진, ‘군락지cascade’, 가로 세로 10m이내 가변설치, 광목에 실크스크린, 2016년. 다육이는 자생력이 강한 식물이다. 혼자 두어도 잘 자라고 씩씩한 것이 매력적인 식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생력이 강해도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무리지어 살게 된다. 다육이에게 배우는 사람의 도리, 그것은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난달에 타이완(臺灣)에 다녀왔다. 고궁박물원에서 전시한 공자(孔子)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은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나라다. 점심 때 인천공항을 출발해 타이완에 도착한 시간에도 여전히 밝은 대낮이라 외국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시차도 느낄 수 없었다. 한국보다 조금 덥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길거리마다 적힌 한자들도 중국에서 쓰는 간체자(簡?子)가 아니라 우리 눈에 익숙한 정자체(正體字)라서 한국에 있는 듯 편했다. 길눈이 밝은 제자가 곁에 있어 더욱 편했는지도 모른다. 타오위안 국제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50분가량을 달려 타이베이 중앙역 근처의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그래도 여전히 창밖은 환했다. 여행 첫날이라 무리하지 말자고 했지만 호텔에서만 보내기가 조금 아까웠다. 호텔에서 가까운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된 장소가 용산사(龍山寺)였다.

종교와 관념, 소속 단체들로
우리는 서로를 구분하고 갈라
교리와 사생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도리

용산사는 숙소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되는 곳에 있었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화려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동(銅)으로 만든 용 기둥에 붉은 기와 위로는 용, 봉황, 기린 등 상서로운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고 평방과 창방, 공포와 주련은 온통 황금색이다. 절 안에는 그 명성만큼이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매캐한 향냄새가 진동한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참배객들도 많은 듯하다. 향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절이 이상하다. 본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 등의 불교의 신들이 모셔진 반면 후전에는 문창제군, 관성제군 등 도교의 신들이 모셔져있다. 안내판을 보니 불교, 도교, 유교의 중요한 신과 민간신앙이 융합된 ‘종합 사찰’이라고 되어 있다. 개성이 강하고 지향점이 전혀 다른 각 종교의 신들이 한 장소에서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공존은 타이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기복을 바라는 신도들의 욕망이 복을 내려준다는 신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배려심이 없는 신들이었다면 이런 화합은 어림없었을 것이다. 용산사를 나와 대만에서 유명하다는 소금커피를 마신 후 숙소에 돌아와 일찍 잤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고궁박물원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서화(書畵) 속 공자’라는 제목의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었다. 전시된 작품은 3m가 넘는 청(淸) 성조(聖祖)의 어필(御筆)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탁본과 공자 초상화, 도서 등 다양했다. 비록 기대한 만큼의 많은 작품이 전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알고 있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공자 작품을 몇 차례 더 둘러 본 다음 다른 전시실의 작품을 보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전주에 사는 K가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오래 전 전주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알게 된 그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다. 동생이 없는 내게 그녀는 항상 동생처럼 생각되는 귀한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토커’라고 얘기하는 관계인데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로 다르게 여행 계획을 짠 기간이 겹쳐 타이베이의 고궁에서 만나기로 했다.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날 때의 기쁨은 남다르다. 내년에 대학에 입학할 아들이 수시에 원서를 넣고 난 후 함께 왔다고 했다. 그녀 곁에는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룬, 그러나 이제는 감정의 격류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은 아들이 서 있었다. 아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이 애틋했다.

그녀와 함께 공자 앞에 서 있으니 느낌이 참 묘했다. 마치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를 보는 것 같았다. 호계삼소는 여산(廬山)에 살던 동진(東晉)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하다가 서로의 이야기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쳐버렸다는 이야기다. 사찰 아래 있는 시내인 호계는 혜원법사가 손님과 작별하는 마지노선이었다. 그 장소를 넘어서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세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할만하다. 세 사람은 종교가 불교, 유교, 도교로 모두 달랐지만 서로의 사귐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가 사람의 도리를 헤치는 쪽으로 변질된 시대에 참고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틱낫한 스님은 ‘너는 이미 기적이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스라엘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불교인, 그리스도교인, 무슬림 같은 여러 이름표들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이런 단어들은 머리에 어떤 이미지를 떠오르게 해서, 그 사람이나 그 단체와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갈라놓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아주 근사한 명분을 우리는 참 많이도 만들어 놓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관념과 겉모습에 사로잡혀 서로를 동일한 인간 존재로 보지 못한다. 이 모든 이름표들의 껍질을 벗겨 하나인 인간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운동이다.”

나는 불자고 K는 기독교인이다. 불자와 기독교인이 유교의 시조를 보러 한국에서 타이베이까지 왔으니 어찌 묘하지 않겠는가. 불자와 기독교인이 공자님 앞에 서서 사람의 도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불교, 도교, 유교의 신들이 다툼 없이 편안하게 한 자리에 앉아 있던 용산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각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들여다보면 그 내용의 8할이 도덕적인 내용이고 기껏해야 2할 정도가 사생관(死生觀)이다. 종교의 본질이나 사생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논리도 사람의 도리를 넘어설 수는 없다. 이런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살 때 종교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하고 어머니가 세 살배기 아들을 유기하며 교주는 이웃 종교인을 학살한다. 그런 의미에서 용산사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여러 종교의 신들은, 신들이 배려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곳을 찾는 신도들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먼 한국에서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에 온 부처님과 예수님이 오랫동안 공자님 앞에 서서 사람의 도리에 대해 생각했다. 평화롭고 깊은 시간이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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