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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사마천의 발분(發憤)

“발분한 이는 인지상정을 넘어선다”

▲ 그림=근호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쓰여진 ‘사기(史記)’는 중국 최고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본기(本紀) 12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서(書) 8권, 표(表) 10권 등 총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신화시대부터 기원전 2세기 말까지 2000여년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 기록이다.

죽음대신 무거운 삶 택한 사마천
삶 속에서 구제발원한 보살 같아
살아남되 생을 탐하지 않는다면
삶의 신비로운 양면성 발견할 것

‘사기’의 세계는 넓고도 크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기에는 그런 세계가 수백, 수천 개나 들어 있다. 수많은 영웅호걸과 갑남을녀가 제각각 자신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하며 행동하는 삶이 ‘사기’에 다양다기하게 약동하고 있다.

사마천의 시대에 태사령(太史令)은 천문을 관측하고 역법(曆法)을 관장하며 조정의 중요한 의례와 행사를 기록하는 직분으로서 특정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맡는 게 관례였다. 사마천은 태사령이었던 아버지 사마담이 죽은 후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중국 역사를 총정리할 것을 당부했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태사령이 된 이후 ‘사기’의 저술을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곤액이 찾아왔다. BC 91년, 북방으로 흉노족이 침공해오자 조정에서는 이릉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토벌케 했는데, 그는 처음에는 전투에서 이겼으나 마지막에는 적에게 사로잡혔다. 조정에서 이릉에 대해 논죄하는 과정에서 사마천은 홀로 이릉을 변호했다. 이에 크게 분노한 황제는 그에게 사형을 명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당시 사형이 언도된 죄인이 사형을 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속량금으로 50만 전을 내는 것과 남근을 잘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에게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이 없었다. 그렇지만 남근을 잘리면서까지 삶을 구걸해야만 하는 것일까. 남근을 잘린 채 살아가는 것은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이 능멸되는 일이어서 당대의 사대부들은 그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사형을 감수하곤 했다.

남근을 잘리는 형벌을 궁형((宮刑)이라고 한다. 궁형을 받는 수형자는 먼저 남근(또는 고환)을 질긴 끈으로 묶인다. 그런 다음 피가 통하지 않게 된 남근이 썩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잠실(蠶室:누에 치는 방)에 방치된다. 이는 그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는 것과, 그런 고통을 겪고나서도 회복하는 동안에 파상풍이 걸리는 등의 문제가 생기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죽음은 태산처럼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털처럼 가볍다고 사마천은 말했다. 그는 궁형을 받고 살아 남는 쪽을 선택했다. 거꾸로, 삶 또한 태산처럼 무거울 수도, 기러기털처럼 가벼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비참함을 견디며 살아 남아야만 할 만큼 의미있는 일을 해낼 때 그 살아남음은 태산처럼 무거울 것이었다.
삶은 기이한 것이어서 나중에 궁형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게을러진 황제는 대전에 나오지 않고 내궁에 머물러 업무를 처리했는데, 궁형을 받은 그는 궁녀들이 많은 내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벼슬자리가 보전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관리로서의 업무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사서 편찬에 쏟아부었다.

사마천은 38세에 태사령이 되었고, 42세가 되던 해에 ‘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47세 때 이릉을 변호하다 투옥되었고, 48세 때에는 가족이 모두 주멸되었으며, 50세에 출옥하였다. 이후 그는 ‘사기’의 저작에 진력했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치욕인 상황에서의 발분(發憤)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때의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차가운 땀이 서 말씩 흐릅니다(冷汗三斗). 하루에 아홉 번 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집에 있을 땐 무엇을 잃은 것처럼 멍청해져 있고, 바깥에 나갔을 땐 방향을 모를 만큼 얼떨떨합니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 편지에서 그는 다시 말했다. “예로부터 부귀하여 이름을 떨쳤지만 곧 잊혀진 사람은 많습니다. 탁이비상(卓異非常)한 인물들만이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주문왕은 옥에 갇혀 ‘역(易)’을 설했고, 공자는 곤액을 겪으며 ‘춘추’를 만들었고, 좌구명은 실명한 후에 ‘국어’를 지었고, 손자는 두 다리를 끊긴 다음 ‘병법’을 완성했고, 여불위는 귀양가서 ‘여람’을 남겼고, 한비는 붙들려서 ‘세난’ ‘고분’을 이루었습니다. 시(詩) 300편도 그 대부분이 성현들의 이와 유사한 발분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맺힌 마음이 풀리지 않아 마음 둘 곳을 잃었을 때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음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했던 것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끊겼을 때 그들은 다시 세상에 설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물러 앉아 글을 쓰고 방책을 논하여 자신의 분(憤)을 알리는 문장을 남김으로써 정(情)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 또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 자료들을 모아 그 전체를 조감하고 그 시종을 정리하여 성패흥괴(成敗興壞)의 이치를 구명하고자 하는 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천인의 제를 구명(究天人之際)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通古今之變)하여 일가(一家)를 이루고자 작정한 것입니다.”

생(生)을 탐하고 사(死)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사마천은 말하고, 불교 또한 중생은 그러하다고 말한다. 발분한 이는 인지상정을 넘어선다고 사마천은 말하고, 불교 또한 발원(發願)한 보살은 그러하다고 말한다. 범속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생을 탐하지 않을 수 있고, 사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지만 사마천은 가벼운 죽음 대신 무거운 삶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이루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에게 삶은 무의미한 생존에서 끝나는 것일 수 없었다. 보살 또한 마찬가지. 보살은 고통스러운 삶을 초월하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성취하고자 발원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고통과 의미 사이의 줄타기이다. 삶은 고통이며 그래서 초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며, 의미를 추구하려면 초월을 뒤로 미루고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 남되 생을 탐하지 않기, 의미를 추구함이 극진하여 죽음을 잊는 경지에 이르기. 사마천의 치욕 속에서의 견인분발은 우리에게 삶의 신비로운 양면성을 생각하게 한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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