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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연구회 ‘깨달음 논쟁’-2. 초기불교의 해오

기사승인 2017.11.07  15: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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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앎’과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 김준호 교수는 “해오라는 용어에는 이해와 깨달음이 연결되어 있다”며 “따라서 해오를 말할 경우 이해와 깨달음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시선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은 인도 보드가야에서 발견된 ‘불족석(佛足石)’. 사진출처=‘아아, 장엄-불교 2500년’

팔리어 사전에서는 깨달음의 원어인 보디(bodhi)를 ‘최고의 앎’ ‘이해’ ‘부처에 의해 달성된 앎’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깨달음은 ‘앎/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하나의 사실로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일상적인 또는 세속적인 의미의 ‘앎/이해’와 구별되는 깨달음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최고의’ 혹은 ‘부처에 의해 달성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따름이다. 이를 ‘부처가 이룩한 최고의 앎/이해’라는 말로 조합해 보아도 깨달음은 여전히 ‘앎/이해’라는 영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처가 성취한 깨달음을 논의할 경우, ‘이해에 의거한 깨달음의 측면/영역’을 먼저 설정할 필요가 생긴다. ‘초기불교의 해오(解悟)’를 주제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논할 경우 반드시 ‘이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깨달음, 앎의 영역을 기반
그럼에도 불교적 논의서는
앎·깨달음 사이 간극 존재

해오, 이해라는 특성 있고
증오는 체험영역을 요구해
해오는 교·증오는 선의 영역


초기불전에서 해오에 대응할 수 있는 말로는 ‘보기, 견해, 이치에 따라 생각을 전개함, 제대로 알다, 온전한 앎, 지혜, 보다/관찰하다’ 등이 해당될 것이다. 또한 생각이나 사유를 의미하는 일련의 용어들이 나타나는 문맥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오의 내용과 성격은 이 용어들이 등장하는 경문에서, 지견(智見)에 의거하여 자신을 향상시켜가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해탈/열반에 이르는 지점을 적절하게 포착하는 만큼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잡는 데는 이보다 먼저 공유되어야 할 것이 있다. 곧, 해오를 말할 때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지점을 드러냄으로써 문제의 소재를 또렷이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해오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단어가 연결되어 있다. ‘이해’와 ‘깨달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해오를 말할 경우 이해와 깨달음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시선이 핵심이 된다.

깨달음의 뜻을 사전적 정의로 풀어보든 해오에서 이해(解)의 뜻을 또 그렇게 풀어보든, 두 경우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어가 바로 ‘앎’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서 논의의 초점을 ‘앎’으로 맞추는 것이 기본적인 접근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오의 정의를 ‘이해를 통해 성취하는 깨달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해결해야 할 논의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앎의 의미와 내용’ ‘앎의 수준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드러내는 것이 논의의 핵심으로 보인다.

해오의 의미를 논의하기 위해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라는 주장을 일단 세워두고 ‘사이’의 뜻에 내재된 의미를 몇 가지 단계를 거쳐 검토하면서 논의의 초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앎과 깨달음 사이에는 수준차이가 있다고 전제해보자. 이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앎과 깨달음은 동일하지 않다’를 생각해보는 일에 해당한다. 앞서 팔리어 사전에 서술된 ‘최고의 앎’이라는 정의도 ‘최고의’란 수식어를 덧붙임으로써 ‘앎과 깨달음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메우려는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나의 의미를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언어로 담아내야 하는 사전의 특성상 ‘최고의’라는 수식어를 채택한 사정을 감안할 수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 언어를 확보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훤히, 제대로, 있는 그대로, 잘, 꿰뚫어, 완전한, 온전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는 경우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럴듯한 수식어를 덧붙이면 언어적으로는 수준의 차이가 생기겠지만, 그 언어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에 담겨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물의 파악에는 늘 그것을 보려는 이에 따라 각각의 해석이 생겨나고, 의미/가치 있음의 영역은 또 그만큼 제각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12)연기, 사성제, 오온, 십이처 등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해보면 어떨까? 실제로 이 서술은 “고타마는 무엇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 중에 하나이다. 이와 같은 대답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은 연기, 사성제, 오온, 십이처가 무엇이고, 또 이들을 어떻게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것인지가 논증되어야 하는 선결과제가 있고, 또 충분히 논증되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 체달(體達), 올바른 관찰’ 등의 서술을 ‘안다’라는 말로 등치해도 좋은가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앎과 깨달음 사이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 해답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박태원에 따르면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확보’하여 ‘실제로 문제를 풀어낸 것’이 깨달음이 된다. 이 관점에 의거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핵심어로써 수행, 해오와 증오, 깨달아 감이라는 불교적 용어를 포괄하고 있는 셈이 된다. 곧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문제해결력의 확보 및 풀어냄’의 유무로써 메울 수 있는 하나의 해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제해결력’이라는 말은 해오에도 증오에도 연관되는 성격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해오의 의미를 또렷이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또 하나의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제 해오와 증오의 관련성을 살펴보면서 해오의 의미와 성격을 다시 드러내보자. 해오에는 이해라는 특성이 있고 증오에는 특별한 체험의 영역을 필수로 하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해오는 부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내장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교(敎)에 해당하고 증오는 특정의 명상 수행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체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선(禪)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팔정도에서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견해’(正見)와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사유’(正思惟)는 해오에 해당하고,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도록 노력하여 나아감’(正精進),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하게 주의력을 일으킴’(正念),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하게 집중된 마음상태’(正定)는 증오에 해당한다고 보자. 이 전제가 타당하다면, 팔정도를 구성하는 각 요소가 순서 그대로 기초에서 시작하여 완성으로 이어지는 직선형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 맞물리고 보완하는 원형의 융합구조라는 점을 인정하는 한 해오와 증오 사이에는 처음부터 선후관계나 비교우위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앎/이해와 깨달음의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성과 차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관점(觀點)이란 말에서 하나의 시사점을 얻는다. ‘[보기는] 보되, [한] 점을 볼 뿐’이라는 뜻에 감추어진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의] 초점을 [통해] 본다’는 말로 풀어보아도 여전히 무게가 느껴진다. 하나의 선도 아니고, 면도 아니고, 게다가 입체적으로 본다는 선언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보이는 하나의 점을 펼쳐보는 일에 불과하다. 또는 이런 기준으로 보니까 잘 보이더라는 하나의 기술이나 경험을 터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선언이 되기도 한다.

시선(視線)이란 말에서 또 하나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보기는] 보되, [하나의] 선을 볼 뿐’이라는 뜻에서 동일한 맥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은 ‘방향’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할 때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특정한 방향성에 가치를 두어보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과 같은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방향성을 또렷이 보여준다. 거꾸로 말하면 특정한 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방향성만 제시할 뿐이라는 숨은 전제도 따라오게 된다.

관점과 시선이란 의미에서 유추되는 이해능력의 허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디가-니까야’의 제1 ‘범망경(梵網經)’에서 왜 ‘그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견해의 한계와 위험성을 그토록 지적하고 있는지를 수긍하게 된다. 곧 앎/이해는 관점과 시선의 형태로 감각대상을 보고 알기 때문에 ‘대상을 인지하고, 판단하여, 해석하는 일련의 인식과정’은 ‘온전함의 결핍’이라는 한계를 떠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앎/이해에 내재된 한계가 일면성에 있다면, 앎/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여 양면성 또는 다면성의 길로 확장시켜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대상의 성격에 따라 충분할 경우도 있겠지만, 만약 지금/여기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복잡성과 변화무쌍함을 내장하고 있다면 앎/이해의 능력은 다시 무력함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범망경’이 지적하고 있듯, 물고기의 자유로운 삶은 그물의 종류에 따라 제한되기도 하고, 보장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앎/이해에 의거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解悟)의 위상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초기불전에서 발견되는 부처의 가르침의 의미영역을 모조리 검토하는 작업은 매우 방대한 일이지만 몇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 김준호
울산대 연구교수

 

 

 

초기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사성제가 제공하는 관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안/불만족/문제거리’(苦)가 ‘발생하는 원인과 조건들’(集)을 찾아내어 ‘온전한 해결’(滅)을 ‘가능케 하는 방법의 확보와 실행’(道)이라는 발상에서 해오의 의미 한 자락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멸도(滅道)를 ‘문제해결 능력의 길’이라고 명명하면, 고집(苦集)은 ‘상황판단 능력’으로 부를 수 있으므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앎/이해가 해오와 연결되는 지점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제해결 능력에는 팔정도의 등장에 따라 해오와 증오의 영역이 겹쳐 있지만, 상황판단 능력은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원인과 조건을 알고 이해한다는 해오의 특성을 추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다시 ‘특정한 사실/사건/상황을 발생시킨 조건’(緣起)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에서 문제점이 발생할 경우 상황판단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적절하게 가동시키는 길, 해오의 의미와 위상은 여기에서 찾아진다.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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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교수 be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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