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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병들지 않는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중

병이란 어느 날 내 몸에 날아든 날개의 씨앗

▲ ‘병이란 내 몸에 날아든 날개의 씨앗’ 고윤숙 화가
병이란 세균과 그들의 생존환경인 내 몸이 만나는 지점, 혹은 내 몸과 내 생존환경인 지구가 만나는 지점에서, 양자의 부조화나 불화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고통 또한 내 삶과 그것의 ‘환경’이라 할 연기적 조건의 만남에서 불화나 부조화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병이나 고통은 양자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기호고 징후다. 내 몸에 난 병은 지금 내 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드러내주는 기호고, 내 몸의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내 몸의 능력을, 그 한계를 드러내주는 한계현상이다.

위대한 건강은 위대한 병과 함께 와
병든 몸, 심연 들여다볼 깊이 준다
죽음 앞에 우리는 쾌활할 수  있나

한계현상으로서의 병은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부딪치지 않고선 사유하지 않으며, 병과 대면하지 않고선 몸에 시선을 주지 않는다. 병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몸에 눈을 돌린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니 병이나 고통을 그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몸이나 삶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기호를 무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가령 두통은 내 몸의 세포나 기관들의 비명소리다. 내 몸의 상태와 더불어 머리를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사용하고 신체를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몰아세웠다고 알려주는 것이고, 이제 좀 쉬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를 신호나 기호로 다루지 않고 진통제를 써서 제거하려 한다면 삶은 조정될 기회를 잃을 것이고, 몸의 능력을 초과한 삶은 계속될 것이며, 결국 크게 앓아 눕게 될 것이다. 고통의 제거가 건강을 망치는 길로 밀고 가는 것이다. 반면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을 때조차, 자신의 신체가 지쳐서 힘들어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몸의 호소에 맞추어 생활을 조절하려 할 때 고통은 건강의 이유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병과 고통은 훌륭한 교사다. 비록 자신이 답을 알진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을 찾도록 촉발하는 훌륭한 교사다.

병과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알게 된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 예민한 감각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예민한 혀를 갖고, 폐가 약한 사람은 예민한 코를 갖는다. 반면 건강한 사람은 튼튼한 몸 덕분에 둔한 감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약한 데가 없기에, 외부의 자극에 예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세상은 참 공평하다. 약한 사람에겐 예민한 감각을 주고, 둔한 사람에겐 튼튼한 몸을 주었으니까.

그런데 병이 많으면 몸이 예민해지지만, 병을 많이 앓는다고 자기 몸을 잘 알게 되진 않는다. 병을 통해 자기 몸에 눈을 돌리고, 병에게서 더 좋은 삶을 배우려 하지 않는 한 예민한 감각은 그저 더 큰 고통을 뜻할 뿐이다. 고생을 많이 하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해도, 거기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한 사는 게 힘들어질 뿐인 것처럼. 배우려는 이에게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는 절실한 물음을 던져주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 절망은 고통스런 삶을 부정할 이유만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진정한 희망은 절망의 터널을 통과한 뒤에 오고, 진정한 기쁨은 고통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았을 때 온다. 니체는 위대한 건강이란 위대한 병과 함께 온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심오한 사유를 만들어냈던 것은 그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던 심각한 병이었다. 그의 사유의 깊이는 유언장을 쓰게까지 했던 거대한 병의 심연에서 얻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건강한 몸이 표면을 여기저기 떠돌 무구성을 준다면, 병든 몸은 심연을 들여다 볼 깊이를 준다. 건강과 병, 둘 다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이기에 역시 ‘공평하다’ 하겠지만, 높이 날고자 하는 이에겐 차라리 병이 더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선 물러서거나 몸을 웅크릴 ‘아래’가, 깊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들지 않고 큰 날개를 갖게 된 이가 있었던가?
병이란 어느 날 내 몸에 날아든 날개의 씨앗.

석두(石頭)의 제자였고 폐사가 된 천황사(天皇寺)를 복구해 살았던 인연으로 졸지에 ‘천황’이란 이름을 얻게 된 천황도오(天皇道悟)가 입적하기 직전에 남긴 기연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천황도오는 한평생 언제나 “쾌활하다! 쾌활하다!”고 외쳤으나, 입적하려는 순간 병을 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롭다, 괴로워! 원주야, 술을 가져다 내게 먹여다오, 고기를 가져다 나를 먹여다오. 염라대왕이 나를 잡으러 왔구나.”

원주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한 평생 쾌활하다고 외치시다가 지금은 어째서 괴롭다고 부르짖으십니까?”

그러자 도오가 다시 묻는다.

“말해보라! 그때가 옳은가 지금이 옳은가?”

그러나 원주는 아무 말도 없었고, 도오는 목침을 떨어치우곤 곧바로 입적했다.

처음의 언행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세인의 눈으로 보면, 이 양반 왜 이러시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마지막 던진 물음은 이것이 ‘왜 이러실까?’ 묻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확연하게 드러낸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쾌활함과 괴로워함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자에게 던져주기 위해, 죽기 직전 자기 위신을 땅에 처박으며 도인으로선 결코 하기 힘든 언행을 한 것이다. 저 물음을 받았던 원주로서는 입적 직전에 던진 저 물음이 평생 잊혀지지 않은 채 남았을 것이다. 그럼, 저 물음을 받아, 말해보라! 도오는 무엇을 묻고자 저런 물음을 던진 것일까?

닥쳐온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면, 평생 외치던 쾌활함이, 혹은 평생 추구하던 쾌활함이 진정 쾌활함일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저 근본적인 고통 내지 괴로움을 가리고 잊기 위한 얇은 장막 같은 것 아닐까? 아마도 도오는 그의 말대로 쾌활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삶을 가르치기 위해 평생 ‘쾌활하다’라고 일삼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근에 있던 이들이라면 그것을 충분히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말로 배우고 머리에 기억한 가르침일 뿐이라면, 죽음 앞에서 피할 수 없이 대면하게 되는, 도오가 던진 저 물음 앞에서 무력하게 와해되고 말 것이다.

평소 ‘쾌할함’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던 원주에게 도오가 저리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이를 시험하려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자신이 가르쳐온 것을 안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의 가르침을 손수 뒤엎는 언행으로 당혹스런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했던 것 아닐까? 죽음 앞에서 대면하는 이 괴로움이야말로 살아있는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실상 아닌가? 그렇다면 쾌활하다 할 때가 옳은가 괴롭다고 할 때가 옳은가? 이를 두고, 선사의 물음이나 선(禪)의 공안은 쾌활함이나 괴로움을 넘어서 있다는 식의 흔한 대답은, 선을 가르치는 체 하며 죽음 앞에서 던지는 이 절실한 물음을 너무 쉽게 뭉개버리며 피해가는 나쁜 방패다. 선을 망치는 ‘선의 방패’다. 차라리 소박하게 진심으로 묻는 게 도오의 가르침에 다가가는 길이다. 저 죽음 앞의 괴로움에 직면해 나는 진정 쾌활하다 할 수 있는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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