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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부처라고 수승하지도 않지만, 중생이라고 부족하지도 않다

기자명 정운 스님

만법은 마음 변화로 나타난 것일 뿐

원문: “그대가 3승 12분교를 배웠다고 할지라도, 모든 (견해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 ‘있는 것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한 침대위에 누워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견해이든 일으키지 말라.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법에 걸림이 없어야 삼계 범부와 성인의 경계를 초탈한다. 이때에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라고 할 수 있다. …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으므로 법도 또한 다르지 않다. 마음이 이미 무위이므로 법도 또한 무위이다. 만법이 다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공하기 때문에 제법도 공하며, 천만 가지가 모두 이와 같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일심의 본체이다. 마음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법도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그대의 견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비유하면, ‘하늘 사람이 보배 그릇의 음식을 먹지만 그 복덕에 따라서 음식의 색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제불이 ‘실로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음을 아뇩보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오직 일심의 다른 모습이 없으며, 광채도 없고, 수승하고 모자람도 없다. 수승함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습이 없고,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모습도 없다.” 

불교는 유심과 깨달음의 종교
팔만사천경전 ‘마음’하나 표현
참 성품과 법은 누구에나 평등
모자람 없기에 중생 모습 없어

해설: 불교는 3장(경·율·론)과 12분교로 구성되어 있다. 12분교는 12분경이라고도 하며, 경전의 서술 방식이나 내용 형식을 12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오직 한 침대위에 누워 있다’는 부분은 ‘유마경’ 5품 ‘문수사리문질품’에 출처를 둔다. 유마거사가 병이 나자, 부처님 말씀에 따라 문수보살과 여러 제자들이 병문안을 간다. 이때 유마거사는 집안 모든 물건을 치우고, 하인들도 모두 보내고 홀로 침대위에 누워 있다는 내용이다. 

이어 ‘만법이 다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는 부분은 이렇다. 불교는 유심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다. 삼계유심이나 만법유식을 주축으로 8만4천 경전을 한 글자로 표현하라고 하면 ‘마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인 ‘법구경’ 처음도 “모든 것은 마음에 근거하고, 마음을 근본으로 하며,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즉, 마음속에 악한 것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까지 거칠게 된다. 이로 인해 죄업이 따른다. 마치 수레를 따르는 수레바퀴처럼”이다. 그리고 대승불교 대표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만약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이 일심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관해야 한다”고 했다. ‘능가경’에서도 “3계는 오직 마음의 분별일 뿐이니, 바깥 경계는 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갖가지로 나타난 현상이다. 중생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분별해 설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마음은 어떤 중생이든 부처와 똑같은 성품이다. 이 청정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근기 때문일 뿐, 참 성품과 법은 허공처럼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런데 ‘열반경’이나 ‘능엄경’ 등에서 ‘이 마음이 신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해서 어디에 있다고 지정하지 않는다. 수년전 서양에서 명상+정신분석, 명상+심리학 등 응용학문이 유행하더니 근자에는 ‘명상+뇌’ 연구가 활발하다.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전공 학문에 끼워 맞추기식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완벽한 학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학자는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늘 사람이 보배 그릇의 음식을 먹지만…’ 부부은 ‘유마경’의 ‘불국품’에서 나왔다. 또 ‘불국품’에 ‘부처님은 일음으로서 일체법을 연설한다[佛以一音演說法]’고 하였다. 부처님은 똑같은 설법을 하지만,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법화경’의 ‘약초유품’에서는 하늘에서 비는 똑같이 내리지만, 각 식물마다 자기의 분에 맞춰 물을 흡수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부처님의 공덕은 똑같지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설법이나 교화는 똑같이 평등하게 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일심의 다른 모습이 없고,…수승하고 모자람도 없다’고 한 것은 중생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않고 부처라고 숭상하지도 않으며, 실다운 것이라고 수승하다고 여기지 않고 헛되다고 내치지 않는 분별심이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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