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4.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올 게 있다

괴로움이 없으면 발심도 해탈도 없다

마음 없는 식물은 고통 없어
고통 있어야 자비도 생겨나
번뇌와 해탈이 결국은 하나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올 게 있다
부차수보리 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법은 누구나 얻을 수 있으므로 평등하다. 세상의 지위고하와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다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무상정등각의 ‘등’각이다.

모든 부처는 깨달은 법이 평등하다. 무아연기(無我緣起)를 깨달았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소언선법자 즉비선법시명선법.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등 일체선법(善法)을 닦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 무상정등각: 더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를 얻는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법이라는 것은 선법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선법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이 설산육년(雪山六年) 고행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35억 년 진화의 산물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삶과 죽음을 걸쳐, 갈고 닦고 개선하고 개혁한 결과이다. 물질적인 육체와 정신적인 문화의 총화이다. 지난 35억 년간 오온의 활동이, 즉 몸과 마음의 활동이 다 선법이다. 왜냐하면 감각과 인식기능을 향상시키지 않았으면, 그리고 감수성과 감정을 발달시키지 않았으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의’ 탄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에게 있는 인식능력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작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동물이었던 시절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능력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향상도 개발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거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업이 쫄딱 망한 사람에게 그의 주머니에 지폐 몇 장이 있다는 이유로 ‘당신은 무일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감각이 없으면, 즉 신경계가 발달하지 않으면 육체적인 고통도 없고 정신적인 고통도 없다. 

불교에서 식물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유는 식물에게는 고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뇌(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식물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면 인간 고통의 원인에 대한 답이 나온다.

감정이 없으면 깨달음이 불가능하다. 감정은 고(苦)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심의 원인이고 자비심의 원인이다. 고를 겪는 것은, ‘초년고생은 사서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기나긴 윤회의 노정에서, 해탈과 대자비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길이다. 보살이 고해(苦海)에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즉 수억(劫) 년 전에, 그만두었어도 좋을 고통을, 더 크고 더 예리하게 발달시켜, 더 크고 예리하게 경험하는 이유이다. 중생의 고통을 같이 겪어보지 않고는 중생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병사와 같은 밥을 먹고 같이 한데서 자며 병사의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중생과 더불어 혹독한 생로병사의 바다에서 같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고통의 우주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수행자의 눈물은 자비로 피어난다. 많이 흘릴수록 많은 자비심이 생겨난다. 그래서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경험은 심지어 번뇌와 고통조차도 의미가 있다. 무한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예수처럼 완성된 상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기나긴 진화(윤회)를 통해서 만들어 가는 존재라면, 모든 경험이 유의미하다. 선악의 경험 모두 평등하게 의미가 있다.

다름이라는 분별을 쉬고 (한 줄로 연결된) 기나긴 시간의 선에서 보면, 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거꾸로 흐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보면, 혹은 아직 시간이 개입하지 않은 세계에서 보면, 생명은 하나이다. 미완성의 생명과 완성된 생명은 하나이다. ‘고통과 번뇌 속의’ 생명과 ‘해탈과 열반의’ 생명은 하나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