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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미술의 본질 : 사실에서 영원으로

기자명 주수완

동·서양 미술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영원’에서 ‘종교’를 읽다

▲ 흔히 생각하는 인도의 기차역(인도 라즈기르).

필자는 불교미술사학자다. 그래서 불교가 발전했던 나라들, 그러니까 인도, 파키스탄, 중국, 실크로드, 일본, 거기에 티베트와 미얀마 같은 나라들을 지금까지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인도나 중국만 해도 너무나 넓기 때문에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그저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들을 대략 가본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여력만 되면 늘 다시 그곳을 누비며 조사하는 꿈을 꾼다.

동·서양의 ‘영원’ 인식에 차이
어느 것이 옳다 할 수는 없어

서양 미술사 걸작품 소개하고
유사한 울림을 주는 불교미술
걸작품들과 상호 비교를 통해
그 조형성이 다르지 않음 조명

유럽 미술품에서 느낀 위대함
불교미술서 같은 감동 느낄 것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고는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로 매력적인 여행지 목록에 들지는 못한다. 물론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은 인도의 그 혼잡함 속에서 초탈의 매력에 푹 빠지기도 하고, 중국이 까마득한 고대로부터 이미 꽃피웠던 그 찬란하고 웅장한 문화유산 앞에서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삼아 그런 곳도 한번쯤 가봐야겠다고는 생각하지만, 버킷리스트에 들어있는 여행지는 대부분 유럽이다. 더구나 불교는 삶을 버리는 종교로 인식되어 그런지 대개 가난한 나라로 인식된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럽은 우선 잘 사는 나라이고, 문화적으로도 더 성숙한 나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왜 불교를 믿는 나라들은 가난합니까?” 사실 이것은 단순히 불교를 믿어서 가난한 문제는 아니다. 동·서양의 오랜 정치·군사적 경쟁에서 동양이 20세기 들어 급격히 서양에 뒤졌던 때문이겠고, 결코 태초부터 서양이 우월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혹은 ‘총·균·쇠’ 같은 책들이 설명해주고 있다. 혹은 공부 잘하고 착한데 싸움은 못하는 아이와 반대로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고약하지만 싸움만 잘하는 아이의 차이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 흔히 생각하는 유럽 기차역(이탈리아 밀라노).

그런데 인문학자들의 주장, 즉 과학기술도 사상과 철학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나 대학이 인문학에도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결국 우리는 싸움(과학기술)에서만 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공부(사상)에서부터 뒤쳐져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종교도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그 논리대로라면 “왜 불교 문화권의 나라들은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불교는 자유롭지 못하다.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19세기 중국이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표방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결국 뿌리까지 바꾸지 않고 무늬만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는 식으로 배웠던 것도 아직 뇌리에 생생하다. 동양의 사상, 종교는 정말로 한계가 있었던 것일까?

여하간 그런 고민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 무렵, 필자로서는 드물게 작년 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몇몇 유럽의 박물관을 답사할 일이 생겼다.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3년간 평소 답사하고 싶었던 곳을 모처럼 다닐 수 있었는데, 마지막 답사 일정은 유럽으로 정했다. 혹자는 그 동안 오지를 돌아다니느라 고생했으니 마지막은 유럽에서 좀 쉬다 오려는가보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불교의 발상지가 오랜 기간 유럽열강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당시 발굴된 유물들 중에 유럽의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있어 그것을 조사하려던 것이었다. 필자 역시 유럽 여행을 동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도 가보고 싶은 아시아의 유적지에 대한 매력에 더 깊이 매료되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유럽을 택했던 이유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유럽 박물관 조사는 언제 다시 가능할지 모를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게 된 김에 불교문화재 뿐 아니라 서양미술사에서 유명한 작품들, 특히 조각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들도 친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 필자를 자괴감에 빠지게 했던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브리티쉬 박물관).

이렇게 긴 시간 자리를 비울 때는 미리미리 해야 할 일을 처리해놓고 떠나야했기 때문에 이 답사를 떠나는 날도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지친 상태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공항으로 나섰다. 그래도 얼추 일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혼자 짐을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 심정은 늘 두근거림과 기대와 염려와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미묘한 시간이다. 아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훌쩍 짐을 챙겨 이탈리아로 떠났던 괴테의 첫 걸음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어찌 괴테 같은 대문호에 비길 수 있으랴만 어차피 착각에는 세금도 안 붙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다 혹시 여행 중에 필자를 급히 찾을 분들을 위해 출발 막판까지 여기저기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하는데, 이번에는 유럽에 간다고 하니 평소 인도나 중국에 간다고 할 때와는 반응들이 사뭇 다르다. 평소의 건강 잘 챙기고 조심하라는 반응과는 다르게 많은 분들이 너무 부러워한다. 맛있는 거 먹고 오라, 푹 쉬다오라 등등…. 물론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아잔타 석굴이나 중국의 운강석굴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걸 보러간다고 했을 때의 반응과 피렌체의 두오모를 보러간다고 했을 때의 반응이 그렇게도 차이가 난다면, 도대체 나 같은 불교미술사학자들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에게는 똑같이 위대한 예술품인데 그것을 주변 사람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서양의 문화와 유물에만 유독 경의를 표하는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왔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 전화를 끊을 즈음 필자는 이미 올해 연재될 글들의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의무처럼 다가왔다. 이게 무슨 올림픽 경기는 아니지만, 꼭 어느 문화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서 애써 경쟁하듯이 다른 쪽 문화도 훌륭하다고 변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만약 그것이 억지로 경쟁을 붙이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겠지만, 최소한 필자는 유럽 미술의 위대함에서 느꼈던 바를 동양미술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왔다. 따라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풀어서 많은 분들이 동양미술, 특히 불교미술에서도 서양의 종교미술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은 동일한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그간 불교미술 연구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올 수 있었던,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그것을 만든 과거 불교미술가들의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더 궁극적으로 불교미술을 있게 한 것은 부처님이시니, 부처님께 드릴 수 있는 일종의 공양이기도 할 터였다.

돌이켜보면 작년 유럽행이 필자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 역시도 대략 25년 전인 대학시절 처음 유럽을 방문했을 때는 일종의 문화적 자괴감 같은 것을 느꼈다. 특히 처음 런던 브리티쉬 박물관의 ‘엘긴 마블스’, 즉 1812년 토마스 엘긴(Thomas Bruce, 7th Earl of Elgin)이 영국으로 옮겨온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조각들을 직접 보았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평소 수업시간이나 답사에서 입이 아프도록 설명을 해야 납득시킬 수 있는 불교미술품과는 다르게 서양조각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페이디아스(Phidias)의 그 조각들은 아무런 설명이 없이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마치 기원전 5세기의 고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막이 올랐던 연극이 지금 내 눈앞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 같은 황홀한 순간이었다.

▲ 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 삼존불과 가섭·아난상. 우리는 여기서 어떤 미감을 읽어내야하는 것일까?

그런데 박물관의 유물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길거리 공원이나 분수대에서 만나는 조각마저도 석굴암보다 위대해 보였다. 품격 있는 유럽의 거리, 저렴하더라도 깨끗한 식당들, 고풍스런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도 모두 신기했다. 개화기 때 처음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던 구당 유길준 선생이 딱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다니면 다닐수록 고향 한국은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신토불이(身土不異)’가 일종의 유행어였는데, 그런 말조차 허구로 다가왔다. 그 충격에 결국 한국미술사는 때려치우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겠다는 결심까지 굳히게 되었다. 나 역시 서양미술에 경도된 평범한 동양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에서 자라난 내가 유럽에서 자라난 사람들보다 더 깊이 서양미술을 연구하게 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하지만 장영주나 장한나와 같은(지금은 조성진이 적절한 예겠지만) 연주자들도 국악이 아닌 서양고전음악으로 명성을 날리지 않는가. 비록 동양인으로 태어났어도 서양미술에 관한한 서양 사람들 보다 더 깊이 이해해보리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은 나의 첫 유럽여행이 끝나갈 무렵 다시금 바뀌어 있었다. 오히려 동양미술, 그중에서도 종교미술인 불교미술의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알고 보면 우리가 칭송하는 서양미술의 상당 부분도 종교미술이 아닌가. 그리스 신들을 형상화하든, 성서를 주제로 하든, 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교가 결국 서양미술의 두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동양에서는 불교가 담당했다.

궁극적으로 짧은 유럽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동양미술이건 서양미술이건 그 추구하는 바는 똑같다는 것이다. 바로 ‘영원’이다. 그 ‘영원’의 다른 이름이 곧 ‘종교’다. 다만 서양과 동양은 그 ‘영원’을 인식하는 방법이 달랐다. 서양의 ‘영원’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다. 이데아는 볼 수 없으며, 우리가 보는 현실은 다만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서양은 그 부정확한 그림자를 최대한 모아 이데아를 복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동양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이데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굳이 어느 것이 더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취향의 문제이다. 그러나 결국 그 끝에는 모두 ‘영원’이 있다.

올해 새 연재에서는 작년 봄에 만났던 서양미술사의 걸작품들을 소개하고 그와 유사한 울림을 주는 불교미술의 걸작품을 들어 비교하면서 사실상 그 조형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똑같이 위대한 작품임에도 그만큼의 대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불교미술에 대해 그간 불교미술로 먹고 살아온 연구자로서의 도리를 다해보려고 한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태운 유럽행 비행기는 이제 막 이륙했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22호 / 2018년 1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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