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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

“모르는 걸 알기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요”

▲ 그림=육순호

오늘날 소피스트(sophist)라는 말은 궤변론자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일 때가 있지만 그들이 활동하던 기원전 4세기 경, 이 말에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녔으며, 강연료와 교습비를 받아 생활했다.

안다는 것 확실한 근거찾으려
끊임없이 의문 제기하며 질문
산파술로 지식인 곤경 빠뜨려
스스로 모르는 걸 아는게 ‘知’

그 무렵, 한 젊은이가 나타나 소피스트들과 30년에 걸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조국인 아테네 사람들은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신은 소피스트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라고 주장한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소크라테스는 외모는 불품 없었다. 그는 땅딸막한 키에 배가 나왔으며, 납작코에 두터운 입술, 튀어나온 눈에 대머리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외모를 가꾸거나 옷을 잘 입으려고 할 때 그는 그런 것에는 가치를 전혀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농담 소재로 삼기를 즐겼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미남자 클리스토블러스보다 잘생겼다고 말하고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명했다.

“어떤 물건이 잘생겼다는 건 그것이 쓸모 있게 만들어졌다는 뜻이지. 그 점에서 볼 때 내 눈은 크리스토불러스보다 잘생겼어. 그의 눈은 앞밖에 보지 못하지만 튀어나온 내 눈은 옆도 볼 수 있거든. 또 땅 쪽으로만 열려진 그의 콧구멍에 비해 들창코인 내 코는 사방의 냄새를 모두 맡을 수 있지. 그뿐인가. 두툼한 내 입술은 덩어리가 큰 음식을 물 수도 있고, 입맞춤도 더 강렬하게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쓸모 있는 게 아니겠는가.”

소피스트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충고의 대가를 받지 않았다. 친구에게 관리를 맡긴 약간의 이자와, 제자들과 숭배자들의 초대나 선물 따위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어하고 꼭 해야만 한다고 믿는 일을 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가 큰 관심을 갖고 추구했던 것은 지혜, 또는 진리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는 스스로 탐구하기도 했지만 주로 남과의 대화, 토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던졌는데, 토론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상대방은 자신의 앎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안다는 것의 확실한 근거를 찾는 입장에서 부단히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사람이 A라는 질문의 답을 B라고 말하면 그는  B의 근거를 물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B의 근거는 C라고 말하면 그는 다시 C의 근거는 무엇이냐고 물었고, 상대방이 다시 C의 근거는 D라고 말하면 그는 또다시 D의 근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질문을 이어가게 되면 상대방은 논리적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또는 무언가를 분명히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곤란지경에 빠진 상대방에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신을 이기려고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오. 나는 다만 당신과 함께 문제를 깊이 검토함으로써 진실이 드러나게 하려던 것뿐이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용한 이 방법을 ‘산파술’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유명한 산파(産婆, 조산원)였고 나는 그 산파술을 이어받았지. 내가 쓰는 방법은 산파들이 아기를 낳는 걸 도와주는 것과 같아. 다른 점은 산파들은 여자들의 해산을 돕지만 나는 남자들의 해산을 돕는다는 것, 산파들은 육체적 해산을 돕지만 나는 정신적 해산을 돕는다는 거야. 나와 토론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지만 차츰 많은 걸 깨닫게 된다네. 그 깨달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거야. 나는 논쟁 보따리가 아니라네. 단지 질문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지.”

소크라테스는 이 산파술로써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을 곤경에 빠뜨렸지만 자신 또한 정말로 아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상대한 사람들 모두 진정한 앎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다른 점은 그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줄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은 모르는 줄을 아는 것(무지의 지)이라고 말했다.

한 전기 작가가 소크라테스의 전기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겸손한 사람’, 그럼으로써 가장 약하고 낮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당당하고 숭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자신의 철학 신념에 따라 청랑순정(晴朗順貞)한 태도로 흔연히 받아들인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십이연기(十二緣起)는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무명(無明)을 든다. 십이연기가 드는 열두 단계 중 주목을 끄는 것은 여덟 번째 갈애(渴愛)와 열두 번째  노사(老死)이다. 이렇게 하여 십이연기는 “무지(무명)하기 때문에 욕망(갈애)을 일으키고,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노사)”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이는 십이연기가 탐진치(갈애)라는 감정적인 일으킴의 원인을 앎이냐 모름이냐(명이냐 무명이냐)에서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지적인 차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처님과 궤를 같이한 탐구자였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앎의 근거를 한사코 의심하며 파내려가되 그 마지막 답을 찾는 것보다는 탐구 과정 자체를 중시한 데 비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지막 답을 자신이 깨달아 밝혀냈노라고 선언하셨다.

“나는 단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무지의 지’에 근거하여 확고부동하게 삶을 살았고, 초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나는 모든 것을 아는 자요, 모든 것을 이긴 자이다”라고 선언하신 부처님께서도 그 앎(깨달음)에 근거하여 확고부동하게 사셨고, 초연하게 삶을 거두셨다.

소크라테스에게도 종교성이 있고, 부처님에게도 철학성이 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중시하고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철학자였으며, 부처님은 답을 중시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세를 허물어뜨린 적이 없는 종교인이었다. 두 분이 간 길은 이렇듯 달랐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했고 죽음에 있어서는 초연했다는 점에서 두 분은 같았다. 그리하여 두 분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스승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삶의 등불이 되고 있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23호 / 2018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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