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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허황된 야심이 부른 해프닝,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기사승인 2018.01.09  10: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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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119호, 도난 후 13시간 만에 반환되다

   
▲ 사진1. 불상의 뒷면, 명문.

우리나라 불상 최대의 도난사건은 1967년 10월24일 오전 10시경 덕수궁미술관 2층 제3실 유리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던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이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다(사진 1, 2). 이날따라 전시실에는 구경 온 손님들이 많이 있었다. 더욱이 이날은 9시40분부터 11시까지 정전이 되어 제3실은 어두운 상태였는데 이때 불상이 없어진 것이다. 국보 제119호에 해당하는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도난당한지 12시간 57분 만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누가, 왜 훔쳐갔는지는 그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1967년 10월24일)와 ‘조선일보’(1967년 10월25일)에 실린 사건의 전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사진 3).

“세계 신기록 남기기 위해 범행”
1967년 메모만 남겨진 채 도난
범인이 6차례 걸쳐 전화했으나
서울말 쓰는 30대 남자 추정뿐
윤곽조차 파악 못한 채 마무리

광배·대좌 모두 갖춘 완전 형태
조형감 등서 고구려 대표 불상
제작 장소와 조성 시기는 물론
천불신앙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불상 연구 중요 자료


“덕수궁미술관은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9시에 문을 열고 관람객들을 받아들였는데 10시40분쯤 당시 경비를 담당했던 김모씨가 불상이 도난당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불상이 있어야 할 진열장 안에는 불상이 사라지고 범인이 남긴 쪽지만 남아 있었다. ‘국장님(문화재관리국장)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밤 12시까지 돌려주겠다고.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범행을 한 것이다. 타인에게 알리거나 얕은 수작 부리지 말라. -24일. 이따 11시경에 국장께 알리겠다(인편, 편지, 전화 등). 지문감정 의뢰 불요.’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은 불상이 도난 된 사실을 즉시 경찰에 알리고 국보 불상이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국에 있는 국제공항과 국제항만을 봉쇄하고 철저한 검색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범인은 쪽지에 남긴 약속대로 오전 11시30분과 오후 3시, 오후 6시 등 세 번에 걸쳐 국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미안하다. 돌려주겠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쪽지를 남겼는데 ‘20시에 역 정문에서 만나자’ 또는 ‘역전 여행사 옆에 21시에 오라’ ‘만복상회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맡겨놓고 가되, 덕수궁에서 왔다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라’는 등 지시만 하고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 사진2.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고구려(539년), 높이 16.2cm. ‘고대불교조각대전’(국립중앙박물관, 2015).

마지막으로 그날 밤 11시5분쯤 범인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금불상을 가져가 보니 순금동상이 아니고 세상이 떠들썩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려주겠다. 불상은 한강철교의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밑 모래밭에 묻어 놓았으니 찾아가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반신반의한 국장은 부인, 운전사와 함께 한강 철교 밑으로 달려갔고, 불상은 비닐봉지에 싸인 채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다행히 파손된 곳 하나 없이 완전한 모습이었다. 범인은 24일 오전 11시30분부터 금불상을 돌려주기까지 국장의 집과 사무실에 6번의 전화를 하였으나 서울말을 하는 30대 남자의 목소리로 추정할 뿐 윤곽을 파악하지 못하여 끝내 잡지 못했다.

연가7년명 불상의 도난사건은 현장에 일부러 증거를 남기고 약속대로 24시간 안에 불상을 다시 돌려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당시 국장이 경찰에 알리지 않고 단독 행동하여 한강 철교 밑 모래밭에서 불상을 되찾았다는 점과 불상에 묻어 있던 모래가 한강 모래와 사질이 다르다는 점, 범인에게 20만원을 주고 불상을 찾았다는 것 등의 이야기가 나돌면서 여러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연가7년명의 국보 불상은 되찾았지만 현장검증에서 단서를 찾지 못하여 범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내지 못한 채 미궁에 빠져버린 사건이었다.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1963년 7월16일에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해 12월5일에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6.2cm의 작은 크기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다. 광배 윗부분에 금이 가고 형태가 약간 휘어져 있으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광배 뒷면에는 ‘연가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 동사의 주지이며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현겁천불을 만들어 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을 비구 법영이 공양한다(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浪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卅人共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因現義佛比丘法穎所供養)’는 47자의 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으나 명문에 의해 평양에 있는 ‘동사’라는 절에서 539년에 제작된 천불 중 하나인 인현의불로, 고구려의 불상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크기가 작은 금동불상은 몸에 지니고 이동하기 쉽기 때문에 불상이 발견된 지역과 제작국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불상의 제작지를 추정하는데 출토지 보다는 양식 고찰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사진3. ‘조선일보’ 1967년 10월25일자 기사.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얼굴과 두 손이 몸에 비해 큰 편이다. 긴 얼굴에는 눈, 코, 입이 분명하게 표현되었고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삼국시대의 초기 여래상으로는 드물게 머리에 나발이 뚜렷하고 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신체의 윤곽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날씬한 몸 위에 양쪽 어깨를 덮은 두꺼운 옷이 있는데 옷자락이 좌우로 날카롭게 뻗어 있다. 이 불상에 보이는 길쭉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 두꺼운 법의, 좌우로 뻗은 옷자락 등은 중국 북위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법의 안에 내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온 옷자락이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손목 위로 걸쳐지는 표현은 북위 효문제(467∼499) 때 실시한 한화정책(漢化政策 : 중국 한나라의 정치와 제도로 돌아가고자 함)의 일환으로 한나라 복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손을 보면,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여원인의 경우,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손 모양에는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겠다’는 의미가 있다.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보주형의 거신광배로 화염문이 가득 장식되어 있다.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6세기의 북위 불상에 비해 얼굴의 세부표현이나 옷자락의 마무리가 명확하지 않고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그러나 광배의 화염문이나 연화대좌의 표현에서는 볼륨감과 역동적인 조형미가 엿보인다. 또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 옷자락이 몸 양쪽으로 뻗치는 강하고 직선적인 조형감 등에서 고구려 불상을 대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 자체에 명문이 있는 예로는 보기 드물며 불상의 제작지, 조성시기와 함께 당시의 천불신앙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23호 / 2018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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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shlee14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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