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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인문학硏, ‘서구의 불교’ 세미나[br]2. 러시아 불교-톨스토이 불교수용과 이해

“삶이란 무엇인지 해답 찾는 과정서 불교사상 수용”

▲ 톨스토이의 불교수용으로 러시아 불교는 학문적 영역에서 사회, 문화적 등의 영역으로 확산됐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 들였다. 17세기 러시아제국의 소수민족인 칼미크인들을 통해 인도·네팔을 거쳐 몽고를 통해 러시아의 남쪽 부리야트 지역으로 들어온 불교는, 1741년 엘리자베트 여제에 의해 공식 종교로 인정된다. 서구 여러 나라의 불교수용 과정에서 보여지는 식민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혹은 기독교 전파를 위한 매개체로서 접근 혹은 수용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바, 이는 러시아 불교가 다민족 러시아제국 내 소수민족의 종교로서 (자연스러운 경로를 통해) 도입되었고, 정교국가인 러시아 제국이 일찍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 기독교 타락상 절감
서적 통해 불교사상 이해 넓혀
‘비폭력  평화사상’ 체계 확립
작품 등에 불교 사상 드러내
간디·마틴 루터 등에 영향 미쳐

아시아계 소수민족들(부리야트, 칼미크, 투바인 등)의 종교로 러시아제국 남중부 지역에 퍼져 있던 러시아 불교(주로 티베트불교)는 19세기 초반에 러시아제국학술원, 카잔대학 그리고 상트페트르부르크대학 등에 동양학부가 개설되면서 활발한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져, 한때 바실리예브(1818~1900), 미나예프(1840~1890) 그리고 올덴부르크(1863~1934)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유럽 불교학의 ‘러시아 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불교는 19세기 중반까지 주로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만) 자리매김 했을뿐, 시베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소수민족들을 제외한 서구 러시아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682년 차르가 된 표트르 1세는 ‘낙후된’ 제국의 발전을 위해 1712년 수도를 전통적인 모스크바에서 제국의 서북쪽 끝단에 위치한 ‘인공도시’ 상트페트르부르크로 옮기고 국호도 러시아제국으로 바꾸어(1721) 스스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페트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후진성’ 극복을 위한 “서구로 향하는 창”의 역할을 하면서 제국의 서구화를 위한 거점 도시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정치, 군사, 교육제도에 있어서 서구적 개혁을 급격하고 광범위하게 추진함 과 동시에 전통에 기반한 (러시아적) 생활양식, 풍습 등에도 서구적인 요소들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한 영토를 가진 다민족 국가 러시아 제국의 저변은 이러한 서구화 개혁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서구와의 접촉이 점점 더 활발해지면서, 서구 지식과 사상(특히 유럽의 계몽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은 러시아 귀족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바, 이는 러시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이어져 러시아가 나아갈 길, 즉 러시아의 정체성의 (재)모색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19세기 들어 본격화된 소위 말하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들 사이의 국가정체성 논쟁은 철학자이며 정치사상가인 차다예프(1794~1856)의 ‘철학적 서한’(1836)으로 인해 촉발되었다.

급진적 ‘서구주의자’인 차다예프는 러시아가 나아갈 길을 제국의 서구화를 통해서 모색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슬라브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이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결과라는 인식하에 러시아는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성이 부재한 물질만능의 타락한 서구의 영향에서 벗어나 러시아 정교와 러시아의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러시아적인 고유성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소명, 즉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타자’로서의 서구를 구원하는 메시아적 소명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러시아 제국 최초의 황제인 표트르 대제(1682~1725)가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로’ 눈을 돌린 이래 (러시아인들에게) 동양은 문명화된 서양적 자아의 대척점에 위치한 야만적이고 극복되어져야 할 ‘후진적 타자’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상기한 정체성 논란에서 보여지는 ‘서구화’ 대 ‘러시아적 고유성 회복’의 틀 속에 탈서구, 혹은 서구의 극복을 위한 또 다른 ‘대안’으로(특히 러시아 낭만주의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를 포함한 동양이 제시된다. 이 경우 동양은 일반적으로 근동, 특히 카프카즈 지역을 의미하며, 이때 동양은 문명화 된, 이성만능의, 인간성을 상실한 서구에 대한 대척점으로 ‘자연적’이며 문명에 때묻지 않은 ‘처녀지’로 ‘설정된’ 동양으로 기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진보와 교육의 규정’(1864)에서 “동양은 진보의 법칙에 종속되기보다는 오히려 진보의 법칙을 부정할 수 있는 세계”이며 “산업발전과 계급투쟁, 인간의 물화가 부재하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인간의 미래가 달린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바, 이때 그의 동양인식도 이러한 ‘이미지화’된 추상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하겠다.

톨스토이가 ‘동양’의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후반 그의 ‘정신적 위기’와 때를 같이 한다. (기존 연구에서) 상호 연관성에 대해 자주 간과되고 있지만, 톨스토이의 정신적 위기는 그의 러시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예를 들어 귀족과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종교인들의 위선과 탐욕, 러시아 민중들의 참혹한 생활과 무지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톨스토이는 ‘바닥까지 추락한’ 정신적 위기의 상황에서 치열한 자아탐색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기독교(러시아 정교)와 근대(러시아를 포함한) 서구문명이 가지는 모순과 한계만을 더 절감하게 되는 바, 동서양 현자들의 삶(소크라테스, 마호메트, 공자, 맹자, 예수 등)과 가르침에서 그 답을 구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톨스토이는 불교와 인도사상에 대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고, 미냐예프 같은 저명한 러시아의 인도학 학자들과도 교류하며 불교사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따라서 톨스토이의 불교 수용은 종교적 (구원의) 차원보다 사회 윤리적, 존재론적 대안 찾기의 모습에 가깝다 하겠다. 즉 톨스토이에게 불교 사상은 서구 문명사회 그리고 서구종교에서 찾지 못한 삶의 의미와 방향, 진리를 가르쳐 주는 현자이며 스승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상가이자 사회비평가, 대문호이며 무엇보다 러시아 민중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톨스토이가 1880년대 초부터 러시아 민중과 함께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가치체계’ 속에 동양적, 불교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담론화 함으로써 러시아 불교는 학문적 영역에서 사회, 문화적, 그리고 실질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는 다민족국가 러시아에서 특정 민족그룹(ethnic groups)의 종교 혹은 문화가 아닌, 상기한 러시아 지성들의 사상적 담론의 연장선상에서 서양에 대(對)한 동양의 사상으로서 불교를 끌어들인다. 그러면 톨스토이는 불교의 어떤 요소들에서 그가, 러시아 사회가, 나아가 전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발견했을까?

사상가로서 톨스토이가 서구 세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중의 하나는 그의 ‘비폭력 무저항’ (“악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평화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이 명제는 많은 동서양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바, 동양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영감으로 작용했으며,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회개혁자인 존 러스킨 그리고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등 서양의 지성들에게는 그들이 나아가야 할 지표였고, 전 세계 톨스토이주의자들에게는 그들 생활의 강령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톨스토이의 급진적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그 수동성이 강조됨으로써 “몽고적 숙명주의” “슬라브적 특수성” 등으로 폄하, 비판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폭력을 ‘주된 악’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모든 조직이나 도그마가 가지는 억압행위는 폭력이고, 따라서 그는 이러한 폭력적 힘을 행사하는 모든 기관이나 단체를, 그것이 국가든 교회든 간에,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에 내포된 이러한 급진적이며 아나키즘(Anarchism)적 요소는 그것이 가지는 무정부적 ‘혁명성’에 해석적 방점이 찍히며 많은 이들, 특히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비폭력, 평화사상은 그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라”는 삶의 명제로 이어지는 바, 이는 타 종교들에서도 근간을 이루는 ‘사랑’의 원칙에 대한 톨스토이의 불교적 이해와 수용의 모습이라 하겠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넘어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은 불교의 핵심적 요소인 “살생하지 말라”의 모습이며 이는 채식주의자 톨스토이의 삶의 모습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단편소설 ‘가족의 행복’(1859)에는 “비록 우리가 (그것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번 생 이전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구절이 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 노년의 톨스토이는 이 말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부드러운 감정과 희열은 우리가 동물이었고, 나무였으며, 꽃이었고 흙이었던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윤회사상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시원(始原)으로, 업보(karma)와 함께 톨스토이가 지향하는 도덕적, 윤리적 삶의 주요 기저로 작용하고 있다. 삶과 함께 ‘죽음의 문제’는 톨스토이 문학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데, 특히 정신적인 위기 이후에 쓰여진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그리고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 당하는 계기가 된 반기독교 소설 ‘부활’(1899)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불교적 시각이 더 잘 드러나고 있다.

이반 일리이치가 죽음의 순간에 보게 되는 ‘빛’은 그가 살았던, 그리고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해 있던 거짓과 위선 그리고 탐욕으로 눈먼, 공허하고 의미 없는 삶에 대한 자각으로써의 빛이며, 삶의 허상을 알게 되는 순간 그를 옥죄고 있던 육체적 고통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된다. 나아가 죽음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따라서 이때 그의 (육신의) 죽음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고 이는 또 다른 삶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톨스토이는 ‘인생독본’(1904~190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탄생은 존재형식의 하나인 죽음이지만 죽음은 다시 존재형식의 하나인 탄생인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한 서구사회와 도그마에 빠진 기독교(특히 러시아 정교)에서 얻지 못했던 삶과 존재의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를 접한 이래 불교사상은 톨스토이에게 “삶을 자각하는 가르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바, 일상을 보는 시각에서도 그에 대한 불교적 영향이 잘 드러나 있다. 만년의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에 대한 순환, 나아가 우리 인간들의 허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고 있다.

▲ 장영숙 교수
“나는 산책을 하는 동안 송아지, 양, 두더지들의 삶을 아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의 순환-역주) 수 없는 시간 동안 이어져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아프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와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것은)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지구 이외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지구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인간사의 위대함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너무나 하찮게 여겨질 것이다.”
 

장영숙 대구 가톨릭대 외래교수
 


[1424호 / 2018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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