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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상 스님의 출가와 수학

기사승인 2018.01.16  10: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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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골·진골의 왕족 출신임에도 주어진 영화 마다하고 출가

   
▲ 의상 스님은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 대신 낭산 북쪽에 위치한 황복사로 출가했다. 사진은 황복사지3층석탑.

법성게 내용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법성게를 짓게 된 인연과 유통을 포함하여 의상 스님의 행장에 대하여 짚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등
의상 관련 17여종 자료 전해

15세 전후 추정되는 나이에
낭산 북쪽의 황복사로 출가

출가 10여년 뒤인 26세 때에
원효와 함께 당에 유학 시도

두 스님의 입당 시도 전후로
고승 출현·중국 구법승 왕래

신라에 ‘화엄경’ 전래된 시기
늦어도 자장율사 때는 확실

화엄과 깊은 인연 자장 율사
신라화엄 초조 인정 못 받아


의상 스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전기 자료로서는 가장 오래된 ‘부석본비’의 단편이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조에 전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 등 17여종의 자료가 전한다. 이들 전기 자료들은 상치되거나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은데, 특히 달리 전하는 의상 스님의 생몰연대·출가시기·입당구법의 시기 등은 ‘부석본비’에 의거하면서, 전기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스님의 생애를 따라가 보겠다.

의상 스님은 부석존자·의지(義持)·원교국사·해동화엄초조 등의 별칭이 있으며, 한자 표기도 義湘과 義相 그리고 義想의 세 가지가 있다. 스님은 속성이 김씨(‘송고승전’에는 박씨)이고, 부(父)는 한신(韓信)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47년(625)에 탄생하고, 제33대 성덕왕 원년(702)에 입적하였다. 스님이 살았던 78년간은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 등 8대 왕을 거치는, 신라 통일기 전후이다. 스님은 신라불교 특히 신라화엄을 꽃피우고 전승시켰다.

그러면 의상스님은 언제 어디서 출가하였으며,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닦았을까? 스님은 관세(冠歲)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 관세는 보통 결혼하기 전 15세 전후로 추정되는 나이이다. ‘송고승전’에서는 스님의 출가 등이 다음과 같이 알려졌음을 서술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명하고 기특하더니 커서는 세상을 벗어나 매임 없이 도(道)에 들어갔으며 심성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生且英奇 長而出離 逍遙入道 性分天然).’

스님의 영명 기특함은 후에 지엄 스님이 영특한 재질을 만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 당시 신라는 혈통 따라 신분을 나눈 골품제도가 엄격하였는데, 의상 스님은 진골 또는 성골이라고 알려져 있다. 성골은 왕이 될 수 있고 진골은 모든 직위와 특권을 다 누릴 수 있으니, 바로 아래 육두품과도 의복이나 주거지등 모든 것이 차별된다(이러한 골품제도의 폐해로 점차 신라가 힘을 잃어버리는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의상 스님은 싯다르타 태자처럼 그 모든 주어진 영화를 마다하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의 평등정신을 실천하여 법계(法界) 공동체를 이루어 갔다.

   
▲ 황복사탑사리함개.

스님의 출가본사인 황복사는 낭산(狼山) 북쪽자락에 자리하였는데, ‘황’자가 들어있는 절 이름으로 보아 왕실과 관계된 사찰이라고 추정되나 창건자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황복사지(경주시 구황동)에는 삼층석탑(국보 제37호)과 석재유물 몇 점만 남아있다.

황복사의 삼층석탑은 의상 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이미 건립되어 있었던 절에 효소왕이 즉위한 해(692), 부왕 신문왕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세운 탑이다. 그 사실은 삼층석탑 해체시(1943년) 불상과 함께 발견된 금동사리함 덮개의 명문 기록에 의해서 알려졌다. 또 명문에 의하면 성덕왕(5년, 706년)이 다시 그 탑 안에 사리와 불상 등을 모셔서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순금으로 조성된 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여래입상(국보 제80호)은 금동사리함과 함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에도 의상 스님이 황복사에 머물렀을 때 이미 탑이 있었음을 전한다. 스님이 황복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할 때 항상 허공을 딛고 올라가 계단을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계단에서 세 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으므로, 스님이 돌아보고 “세인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히 여길 것이니, 세상에는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는 것이다.

황복사가 자리한 낭산은 신라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지막하게 펼쳐져 있는데 당시 매우 신령스러운 산으로 간주되었다. 도리천에 묻혔다는 선덕여왕릉이 낭산 남쪽 중턱에 있고, 그 아래 기슭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사천왕사는 의상 스님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당나라 침공을 막기 위해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하려고 세워졌다.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의 위가 도리천이니,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는 곳이다. 사천왕사 자리는 칠처가람터의 하나이기도 하다.

황복사는 당시 국가 대찰인 황룡사에서 가까운 낭산 북쪽 모롱이만 돌면 바로 보인다. 규모도 황룡사에 비하면 별로 크지 않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황복사로 출가한 것은 자신이 왕족이라서 왕실과 인연 깊은 사찰을 택한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에 화엄본찰로 삼은 부석사의 위치가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곳’이라 함을 볼 때, 스님은 뜻한 바 있어 황룡사보다 다소 한적한 황복사로 출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황복사의 금당자리가 발굴되면 사격이 더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의상 스님은 황복사에서 출가한지 10여년 후인 650년에 원효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게 된다. 그때 원효 스님(15세 또는 28세 출가)은 34세이고, 의상 스님은 26세였다. 두 스님이 입당을 시도한 것은 ‘당나라 교종이 여러 가지로 융성함(聞唐土敎宗鼎盛)’과 ‘현장삼장의 자은문(慕?三藏慈恩之門)을 흠모’한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는 각각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과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에 전한다.

   
▲ 황복사탑서 출토된 순금제여래입상(왼쪽) 및 순금제아미타좌상(오른쪽).

그때까지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이 어디서 어떤 수행을 하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각기 나름대로 ‘화엄경’을 포함하여 경율론을 공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두 스님의 입당 시도와 관련하여 그 전후 불교계 상황을 간단히 돌아보자.

신라는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법흥왕 14년, 527년) 후, 법흥왕을 이어 진흥왕의 불교진흥으로 고승들이 배출되고 구법승의 중국왕래가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원광(圓光, 555~638) 스님과 자장(慈藏, 576~655) 스님이 수?당나라 불교를 유입하여 신라불교 중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원광 스님은 진평왕 11년(589)에 중국에 유학하고 22년(600)에 귀국하여 대승경교를 강설하였다. 황룡사 백고좌법회시 제일 상수(上首)로서 대승법문을 설하였고 유식계통의 섭론학을 연구하였다. 원광 스님이 산신의 권유로 중국에 간 연유와 얽힌 설화에 의하면 그때도 민속적 산신 등이 불교신중으로 습합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광 스님이 두 화랑의 청에 의해 세속오계를 설하여 화랑정신을 확립시킴으로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초석을 다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장 스님은 부모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기도하여 출생하였고, 사촌간이었던 선덕여왕 5년(636)에 당으로 건너갔다. 643년(선덕여왕 12년, 정관17년)에 귀국하면서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일부(400여함) 등을 모셔왔다. 우리나라에 ‘화엄경’이 전래된 것은 진흥왕26년(565)에 진(陳) 문제(文帝)가 1700여권의 경론을 보냈을 때로 추정되는데, 늦어도 자장 스님이 400여함의 대장경을 모셔왔을 때임은 확실시된다.

자장 스님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꿈에 문수보살로부터 범게를 받았다. ‘화엄경’의 사구게였다. 스님은 귀국 후 자신의 생가를 절(元寧寺)로 만들어 그 낙성식 때 화엄만게를 설하여 화엄선지식의 감응을 입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자장 스님은 화엄과 인연이 적지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자장정율’조에 보이듯이 스님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수계해주는 등, 율사의 면모가 더 크다. 스님은 대국통이 되어 승니의 규범과 교단의 제반사를 정비하고 계를 잘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장 스님은 중국의 불교문화와 대장경을 전래하였으며, 승니의 기강을 바로잡고 계율의 정착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는 등 호국호법의 불사도 크게 일으켰으니, 불교의 신라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스님이 만년에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하고자 간절히 원하고 기도했지만 ‘아상(我相)’ 때문에 결국 현신한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설화는, 자장 스님이 비록 화엄과 인연은 많으나 후에 형성되는 화엄종의 초조는 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상으로 볼 때는 신라불교가 거의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불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아상’을 경고한 설화에서도 시사하듯이 실은 귀족과 서민 차별 없이 누구나 의지하고 신봉한 불교였다. 특히 일반 서민대중 속에 깊숙이 들어가 시골 골목과 장터 등에서 교화를 폈던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 대사들의 신이한 방편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인에게는 처음부터 신라불국토사상이 마음속에 널리 퍼져있었다.

일반적으로 삼국불교의 특색을 고구려는 삼론, 백제는 율학, 신라는 법상 유식으로 간주한다. 백제가 소승율학이라면 신라는 대승율학이다. 삼국은 그 외에도 천태, 열반, 미륵, 미타, 섭론, 화엄 등이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즈음해서 단연 화엄교학이 위세를 떨쳐갔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의상 스님은 원효스님과 서로 왕래하면서 공부하다가 함께 육로로 고구려 땅을 거쳐 입당하려고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24호 / 2018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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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스님 jeo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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