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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관무량수경’의 매력

“누구나 부처님 떠올리고 염송해 왕생하리”

▲ 국보 제321호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무량수경’은 ‘무량수경’ ‘아미타경’과 함께 정토 삼부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은 모두 범본(梵本)이 남아 있습니다. 확실히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이 맞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은 범본이 없습니다. 학자들은 인도에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무량수경’ ‘아미타경’과 함께
정토삼부경 이루는 경전 평가

어머니 이야기 담은 관경 특징
정토신앙 성립 원천 첫 번째는

부처님이 위제희 부인 간청에
“극락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것

관무량수경 갖는 최고 의미는
패륜아와 오역죄인이라 해도

아미타불 지극히 칭명한다면
일체죄업 소멸 극랑왕생 가능

옛날 중국에서는 인도에서 찬술된 경전은 진경(眞經)이라 하고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이나 그렇게 의심되는 경전은 위경(僞經)이나 의경(疑經)이라 불렀습니다. 위경이나 의경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글자 그대로 ‘가짜경전’이라고 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용되는 상황(context)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그러한 상황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전이라는 의미가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관무량수경’이 만들어지는데 어떤 필연성이나 필요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관무량수경’은 간략하게 ‘관경’이라 부른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도 이제 그렇게 부르고자 합니다.

‘관경’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패륜아 아들을 낳아서 고통 받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헤아리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위제희(韋提希, Videha) 부인은 극락을 그리워합니다. 그 분에게는 극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위제희 부인의 간청에 응해서 극락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이 장면이 정토신앙을 낳은 원천의 하나라고 봅니다.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에서 법장보살이 48가지 서원을 세워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극락을 건설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무량수경’의 경우는 부처님 입장에서 극락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관경’의 경우는 바로 중생의 입장에서 극락정토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관경’이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을 보완하는 한 측면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락이 말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극락에 우리가 갈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이에 대한 정토불교의 대답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설해집니다.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설해진다기 보다는 시간적으로 차례로 설해지면서 먼저 설해진 방법을 뒤에 설해지는 방법이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설해지는 방법은 바로 극락이나 부처님을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이를 관(觀)이라 합니다. 관불(觀佛)이나 관상(觀像)이라 합니다. 지금 말로 하면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토 삼부경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제시되는 방법입니다. 중국 정토교의 역사를 연 스님 중의 한 분으로 평가받는 여산혜원(廬山慧遠) 스님은 백련결사(白蓮結社)라는 염불결사를 하였습니다. 그때의 수행법이 바로 관불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염불입니다. 관불이나 관상은 보통의 범부들이 행하기는 좀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용어상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좀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염불이라고 하면 ‘염’이라는 말 자체 역시 ‘이미지 메이킹’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염불이나 관불이 혼돈될 수 있습니다. 그런 흔적은 ‘관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염을 관의 의미로 쓰는 것입니다.

‘관경’에서 염과 관이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칭(稱)’입니다. 칭명(稱名)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상염불이라고 하면 관불을 가리키고 칭명염불이라 하면 염불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혼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염불’이라는 말 대신에 ‘칭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이 편지 시리즈를 시작할 때 첫 편지에서 바로 ‘칭명사’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칭’이라는 말을 잘 안 썼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염불암’이나 ‘염불사’라는 절은 많은데, ‘칭’자가 들어가는 절 이름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관경’이 갖는 두 번째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극락을 가는,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설해집니다. 그것이 16관법(觀法)입니다.

16관 중 13관까지를 정선(定善)이라 합니다. 관법 즉 선정 속에서 극락을 가기 위해 선을 닦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극락과 아미타불, 관음, 세지를 관찰하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14관에서 16관까지를 산선(散善)이라 합니다. 그렇게 선정 상태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범부를 위하여 산란함 속에서도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됩니다. 그것이 염불 즉 칭명입니다. 이 산선에서 이른바 구품왕생(九品往生)이 설해집니다. 그러니까 구품왕생이 모두 산선의 일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관경’은 정토사상사를 반영하여 관불과 칭명의 두 가지를 함께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불에서 칭명으로 방법론을 교체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품(下品)의 범부를 위한 수행법을 제시하는 것이 ‘관경’이 등장하는 의미의 하나라고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품 중에서도 하생(下生)에서는 우리가 “능히 염불 즉 관불을 할 수 없다면 마땅히 무량수불을 칭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라면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무량수경’의 제18원에서는 아미타불 당신의 이름을 부르라는 요청 내지 명령은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 부르는 것이라는 사례를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경’에서는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제시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 정토종에서는 정토 3부경 중에서 ‘관경’을 가장 중시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 패륜아 아들(아사세)과 같은 오역죄인의 구제는 정녕 포기하고 말아야 하는가? 악인에게는 구원의 밧줄이 내려지지 않고 말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진일보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는 점입니다. ‘무량수경’의 경우는 예외조항으로 묶어둡니다. 제18원에서 극락에 왕생(往生)하는 방법으로서 칭명을 제시하면서도, “다만 오역죄를 범한 자나 정법을 비방한 죄를 저지른 자는 제외한다”고 단서(但書)를 달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어머니라고 한다면, 그 아들놈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용서하지 말고, 지옥 가라고 저주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관경’에서는, ‘오역십악(五逆十惡)’을 범한 자들조차 아미타불의 이름을 칭명한다면, 80억겁이나 되는 오랜 세월동안 윤회를 거듭하면서 지어온 죄들이 다 소멸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악인구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릴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24호 / 2018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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