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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입당유학의 시도와 열반경 수학

기자명 해주 스님

고구려 통한 첫 번째 입당 좌절 뒤 보덕화상에게 ‘열반경’ 배워

▲ 13세기 일본 화엄종에서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의 전기를 그린 그림. 원효 스님이 고분에서 꿈에 귀신에게 시달려 잠을 편히 못자는 장면을 묘사했다.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과 함께 650년(진덕여왕 4년)에 육로로 입당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국경을 순시하며 지키던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라고 오인되어 붙잡혀서 수십일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났다. 그래서 1차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첩자 몰려 입당유학 실패
귀국길 평양 지나던 길에
연복사에서 보덕화상 친견

첫 번째 입당 시도 11년 뒤
백제 멸망으로 해로 열리자
육로 아닌 해로로 입당 시도

원효·의상 스님 입당 도중에
해골과 밤새 잠 잔 원효 스님
깨달음 얻고 입당구법 포기

원효 스님 깨달음 얻은 곳
당항성 인근 추정됐으나
여러 비문에 직산으로 기록

의상 스님 홀로 입당 구법
종남산 지상사서 지엄 만나

돌아오던 길에 두 스님은 평양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서 보덕(普德) 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게 된다. 보덕화상은 보의(普依) 성사로도 불리며, 자는 지법(智法)이다. 스님은 영탑사를 비롯해 도처에 사찰을 세우고 수행 정진하였다고 한다.

보덕화상은 ‘비래방장(飛來方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삼국유사’ ‘寶藏奉老普德移庵’)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만을 존숭하고 불법을 숭상하지 않으니 나라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탄식하고,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연복사 방장을 공중으로 날려 백제의 완산주(현 완주군) 고달산(현 孤大山)으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보장왕 9년(650) 6월의 일이다.

이 비래방장설은 보덕화상이 고구려에서 백제로 몰래 잠행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화상은 고달산에 경복사(景福寺)를 창건하고 널리 ‘열반경’ 법석을 폈다. 보덕화상의 제자로는 무상, 명덕 스님 등 11명이 보이는데 제자들이 지은 절이 지금도 완주 모악산과 진안 마이산, 정읍 칠보산 등지에 남아있다. 후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반룡산 연복사에 이르러 보덕성사의 비래방장 옛터에서 예배하고 지은 시에서, 두 성인이 ‘열반경’을 배웠음을 담고 있다. ‘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에 수록된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열반과 방등의 가르침/ 우리 스승이 전해 주셨네.

두 성인이 경을 배울 때(원효와 의상이 성사에게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 고승께서는 그때 독보적이셨네.
인연 따라 남과 북에 계셨으나/ 도에서는 맞이하고 따름이 없네.
애석하도다, 방장을 날린 후에/ 동명왕의 옛 나라가 위태해졌네.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는 경복사지는 최근 전북대의 발굴조사로 비교적 석축이 잘 남아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고덕산 경복사지’ 명문과 650년에 창건되었다는 명문이 있는 기와편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복사지는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은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제2차 입당을 시도하게 된다. 백제가 멸망(660)되어 해로가 열린 것이다. 당으로 가는 항구가 있는 해문(海門) 당주계(당항성)로 가서 큰 배를 구해 푸른 바다를 건너갈 계획을 세우고 서해안으로 길을 떠났다.

▲ 제천 월광사지 원광선사 대보선광탑비. 보물 360호로 국립박물관 소장.

두 번 입당을 시도한 그 사이 11년간 행적은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이 창건한 사찰의 사적기 등을 통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사찰을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항성은 당성이라고도 하는데 그 당시 바닷물이 성 바로 앞에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후로 여러 차례 매립과 간척사업에 의해 바다가 흙으로 메꾸어져 이제 그 부근은 큰 마을이 되었다. 현재 당성은 동문·남문·북문터와 우물터 그리고 망해루 등 건물지가 발굴되어, 1971년에 사적 제217호(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두 스님은 배를 타러 가던 도중에 갑자기 궂은비를 만나 비바람을 피하려고 길가 땅굴[土龕] 사이에 몸을 은신하여 밤을 지냈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땅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古墳]이었고 해골도 뒹굴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땅도 진흙투성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워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원효 스님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에 모든 것이 마음도리임을 깨닫고 입당유학을 포기하였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땅굴과 고분도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다. 마음 외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송고승전’(988)보다 100여년 후에 이루어진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 스님의 ‘임간록(林間錄)’에서는 원효 스님의 깨달음을 더욱 극적으로 나타낸 다른 오도송을 전한다. 즉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도 마찬가지이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髑髏如是)”라는 게송이다. 원효 스님이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 물을 시원스럽게 마셨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라 구토가 났기에, 문득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어서 읊었다는 것이다.

‘화엄연기(華嚴緣起)’에는 고분의 이 장면을 원효 스님이 꿈에 귀신에게 시달려 잠을 편히 못자는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화엄연기’는 정식 명칭이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며, 일본의 국보로서 현재 교토(京都) 고산사(高山寺)에 소장되어 있다. 가마쿠라 초기 고산사의 묘에(明恵, 1173~1232) 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단에서 동아시아 화엄조사로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을 지정하여 그 전기를 ‘송고승전’에 의거하여 두루마리 그림[繪卷]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의상 그림[義湘繪]’ 4권 ‘원효 그림[元曉繪]’ 2권이었으나 현재는 각각 3권씩 총 6권으로 되어있다. ‘의상 그림’은 의상 스님이 원효 스님과 함께 당(唐)으로 유학을 떠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지막으로 부석사에서 법회를 열어 법을 설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원효 스님과 함께 이틀 밤 머물렀던 곳, 원효 스님의 오도처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서 원효 스님의 오도처가 화성 신흥사, 평택 수도사, 당항성 부근이라는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당항성 부근 무덤이라고 보는 주장은 신라 견당사들이 주로 이용하던 루트 중, 경주-문경-충주-여주(수로) 또는 직산(육로)-남양 당은포로에 주목하고, 그중에서도 편리한 여주 수로를 통해 당은포로 향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당은포는 당항성의 관문항이다. 그래서 원효 스님의 오도처가 당항성 인근의 어느 무덤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두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 ‘직산’이라고 전해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에 수록되어 있는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忠州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890)’에는 직산(樴山)의 □□□□가 원효 스님의 성도처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랑선사가) 현묘하고 미묘함[玄微]을 찾고자 해서 이에 직산(樴山)에 이르러 □□□에 머무르니 (그곳은) 신승 원효가 도를 이룬 곳이다.

원랑선사는 신라 대통(816~883)선사로서 낭혜화상 무염에게 선법을 수학하고 입당 유학하여 866년에 귀국하여 월악산 월광사에 머무르면서 선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탑비는 금성군(전남 나주시) 태수 김영(金穎)이 찬술한 것이다. 현재 보물 제360호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원랑선사가 머물렀다는 원효 스님의 오도처가 직산의 어느 장소인지는 비문이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이 글을 “~직산에 이르러 □□에 머무르니 □□는 신승 원효가 도를 이룬 곳이다”라고 번역할 수 도 있다.

아무튼 이 직산이라는 지명이 홍경사 사적비에도 보인다. 고려 현종 1026년에 세워진 ‘직산 홍경사갈(稷山 弘慶寺碣)’(국보 제7호)에 의하면 홍경사가 직산현 성환역 북로에 있다고 한다. 직산 주변은 인가가 드문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서는 직산이 호남과 한양을 잇는 갈림길로 교통의 요지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못이 있고 사람과 사는 곳이 떨어져 있어 강도가 출몰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종이 불법을 펴고 길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선 홍경사라는 사찰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갈기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부근을 둘러보면 이정표 삼을 만한 자연적인 특징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당시 비바람과 진흙땅에 길을 계속 재촉하기 어려웠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원효 스님은 입당할 마음을 바꾸어 되돌아가고, 의상 스님 홀로 맹세코 죽어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원(誓死不退)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의상 스님은 등주(登州)에 도착하여 걸식하며 한 단월 집[信士家]에 이르자, 스님의 용모와 안색이 뛰어남을 보고 그 집에 오래 머무르게 하였다. 단월이 되어 호법하겠다는 서원으로 의상 스님을 외호하게 되었던 선묘(善妙) 낭자도 그때 스님에게서 교화를 받은 것이었다. ‘의상전교’에서는 양주 주장(揚州 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청으로 관청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양주는 장안으로 가는 주요 거점도시 중 하나로 간주된다. 스님은 그 이듬해 지엄(智儼, 602~668)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도착하게 된다.

의상 스님이 신라로 귀국할 때 다시 단월에게 인사차 문등(文登)으로 갔다고 함을 볼 때, 스님의 신라에서부터 지상사에 이르는 여정은 경주-직산-당항성(당은포)-등주(문등현)-양주-장안-종남산 지상사의 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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