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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혜능의 돌연한 깨달음

기사승인 2018.01.30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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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아를 다 찧은 지는 벌써 오래됐습니다”

   
▲ 그림=육순호

선(禪)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혜능(惠能)은 619년에 중국 광동의 영남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성이 노(盧)씨인 그의 부모는 남해로 이사했는데, 당시 북방 사람들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남방 지역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미숙한 ‘오랑캐’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 더해 부모가 아주 가난했던 터라 혜능은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이었다.

배움 없었던 일자무식 혜능
금강경 듣고 홍인대사 찾아가

부처 되려고 시험에 응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방앗간 일해

홍인대사 금강경 요체 설법에
스물셋에 깨달음 성취한 혜능
모든 중생에게 있는 부처성품
전생 공덕 없어도 깨달음 가능


하지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대개의 사람은 말과 글을 통해 불법의 요체를 향해 나아가지만 특별한 다른 부류의 사람은 말과 글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그를 향해 나아가는데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으면 곧 삐져 나오듯이 곧바로 마음의 요체로 나아가는 그의 특별함은 곧 드러났다. 생계를 위해 장작을 파는 직업을 갖고 있던 혜능은 어느 날 손님의 부탁을 받고 장작 한 짐을 객점에 옮겨다 준 다음 밖으로 나오다가 어떤 사람이 경 읽는 소리를 들었다. 듣는 순간 곧바로 경이 설하는 바를 이해한 혜능은 그에게 경의 이름을 물음으로써 그것이 ‘금강경’이라는 걸 알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북 황매산으로 홍인(弘忍)대사를 찾아갔다. 홍인이 혜능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제자는 신주에 사는 백성이온데, 멀리서 와 스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부처되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영남에서 온 오랑캐로군! 그런 주제에 감히 부처가 되겠다고?”

선의 전통에서 상대방에 대한 호의는 흔히 불친절로써 표현되곤 한다. 따라서 홍인의 이 응수는 한편으로는 불친절로 가장된 친절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찾아온 젊은이의 근기를 가늠해보는 시험이었다. 시험지를 받아든 혜능은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겠습니다만 불성에야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오랑캐의 몸과 스님의 몸이 같지는 않겠습니다만 불성에야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대답은 홍인을 감탄시켰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매긴 점수를 공개하지 않았다. 초라한 행색에다 교양인으로서의 기풍이 느껴지지 않는 혜능의 뛰어난 근기를 인정할 경우 제자들이 시기하리라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홍인은 혜능에게 밖으로 나가 막노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혜능이 다시 반격했다.

“저는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이 복밭[福田]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더러 그 복밭 말고 다른 어떤 밭을 일구라는 것입니까?”
“이 오랑캐는 근기가 너무 날카롭구나! 나가 있거라!”

이렇게하여 혜능은 방앗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홍인은 자신의 법통을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기로 하고 제자들에게 게송을 한 편씩 지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실제로 게송을 지은 사람은 신수(神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제자들이 신수만이 홀로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게송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은 보리수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맑은 거울(心如明鏡臺)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때묻지 않도록 하리(勿使惹塵埃)

신수의 이 게송을 보고 홍인은 적이 실망했지만 “이 게송을 의지하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간 칭찬해주는 한편 신수를 따로 불러 게송을 새로 지을 것을 명했다.

며칠이 지나 신수의 게송을 듣게 된 혜능은 게송을 지은 이가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는 곧바로 신수의 게송이 걸려 있는 장소로 나아가 글자를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도 게송을 지을 테니 그것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깨달음엔 나무 없고(菩提本無樹) 
거울 또한 대 아니라(明鏡亦非臺)
한 물건도 본래 없거늘(本來無一物)
티끌 어디서 일어나리(何處惹塵埃)

다음 날, 스승이 가만히 제자에게 찾아가 물었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
“예, 방아를 다 찧은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체로 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그 날 밤, 스승의 방으로 혼자 찾아온 제자에게 홍인대사는 ‘금강경’의 요체를 설해주었다. 설법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이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혜능이 큰 깨달음을 성취하니, 때는 661년,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상식(常識)은 ‘불변하는(常) 앎(識)’이라는 뜻이며, 이는 모든 보통사람들을 지탱하는 기초이다. 상식은 하여 어느 때나 통용될 뿐 아니라 어디서나 통용되는 앎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인’들에게만 그러할 뿐이다. 세상에는 간혹 ‘비상(非常)’한 사람들이 탄생한다. 그 비상탁이(非常卓異)한 사람들은 상식적이지 않으며, 눈이 번쩍 뜨이는 탁월한 성과를 창출해낸다.

혜능은 그 비상탁이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경문을 듣는 순간 그 뜻을 알았고, 방아를 찧고 있었을 뿐이지만 홍인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정진 수행한 승려들을 넘어섰다.

불교에서는 이런 유의 특별함을 전생의 공덕으로써 설명하곤 한다. 전생의 공덕이 있었기 때문에 혜능이 단박에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다시,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고 설한다. 이 설법은 전생의 공덕이 없더라도 단박에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되면 비상탁이는 비상탁이가 아니게 된다. 혜능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은 그 본성에 있어서 비상탁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비상탁이함이라는 씨앗을 싹틔우느냐 마느냐, 꽃봉오리를 터뜨리느냐 못 터뜨리느냐이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자. 내가 그리는 작은 나를 무너뜨려보자.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비상탁이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지금 비상탁이한 존재가 아닐까. 그것은 내가 삶에 전심전력을 걸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자.

마음을 일으키자. 큰마음을 내자. 죽자.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자. 아니다. 다시 태어날 필요는 뭐가 있겠는가. 단지 죽을 뿐, 그 죽음으로써 비상탁이해지기조차 나는 바라지 않는다. 모든 바람[望]이 끝난 그곳, 그리하여 모든 것이 멈추는 그 자리! 일체가 활발발(活潑潑)한 그 자리!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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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빈 교수 jeongbin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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