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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대 총무원장 법룡 스님

중앙종회 막강한 권한에 밀려 실권없고 존재조차 미미

▲ 법룡 스님
 

1962년 8월20일 서울 문교부회의실에서 열린 불교재건비상종회(비상종회)는 불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날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던 비상종회가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50명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앞서 법륜사(대처)측은 통합종단 출범 정신에 따라 양측 25명씩 동수로 선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계사(비구)측과 정부측이 추천한 사회인사들은 무기명비밀투표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이날 비상종회는 법륜사측이 불참한 가운데 무기명비밀투표방식으로 조계사측에서 32명, 법륜사측에서 18명을 선출했다. ‘조계종사(교육원)’에 따르면 이 같은 결정은 정부의 의지가 일정부분 반영된 것으로, 정부는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비구측이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불교조계종 서무부장 역임
1962년 중앙종회의원으로 당선
석진스님 사퇴로 총무원장 피선
 
통합종단조계종 기틀 다졌지만
대처측 인사라는 이유로 저평가

법륜사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법륜사측 비상종회의원들은 즉각 성명을 내고 “종회의원 선출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비상종회에서 선출된 18명의 법륜사측 중앙종회의원도 “이번 결과는 통합원칙에 위배된다”며 “근본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합법적인 투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앙종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통합종단이 출범한지 불과 4개월 만에 또다시 분규를 예고했다.
그러나 이미 여론은 조계사측으로 기울어 있었다. 언론은 앞 다퉈 ‘불교분규의 재연’을 예고하면서 그 원인을 법륜사측으로 돌렸다. ‘조선일보’는 8월24일 “거의 수그러지던 불교분쟁이 종회의원 선출을 둘러싸고 다시 불꽃을 불러일으킬 기세”라며 “종회의원 선출에 법륜사측에서 불만이 있다고 하지만 선거법규에 따라 그 자체 요건에 맞는 사람 가운데서 뽑았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비상종회의원들의 판단은 매우 현명했다”며 “양측에서 동수의 의원을 내놓는다는 것은 형식상으로 공평한 듯 보이지만 분규를 영원히 끌고 가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고 평가했다.

통합종단 중앙종회는 8월25일 오후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예정대로 초대 중앙종회 개원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법륜사측 종회의원 18명은 모두 불참했다.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제1회 중앙종회는 8월26일 오후 조계사 기념관 2층 회의실에서 재적의원 50명 중 27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첫 안건으로 의장단 선출을 상정하고 무기명비밀투표를 통해 최다 득표(24표)를 얻은 벽안 스님을 초대 종회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에는 서각, 경산 스님을 각각 선출했다. 서각 스님은 법륜사측에서 추천된 종회의원으로, 이날 회의에 불참했지만 20표를 얻어 수석부의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법륜사측에 대한 배려차원으로 비춰졌다.

중앙종회는 이어 ‘중앙종회법 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중앙종회법은 중앙종회의 구성과 권한, 의사진행 방법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중앙종회에 방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중앙종회법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종단의 최고의결기관으로서 △종헌·종법 제개정 △종정의 긴급 명령 및 긴급 재정처분의 승인 △종단 간부의 선출, 임명 승인 또는 불신임 △종무기관 감사 및 종무원 감독 △예·결산안 △재단법인 중앙교원의 재산관리 △징계자의 사면·경감·복권에 관한 동의 등의 권한을 갖는다. 이는 중앙종회가 단순한 입법기구를 넘어 종단의 종무행정권한까지 갖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종무행정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의 권한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종헌을 통해 종단 대표권과 본말사 주지 인사권을 종정에게 부여했고, 여기에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 간부의 선출 및 불신임권과 종단 재산관리권 등 사실상 모든 종무행정의 권한을 중앙종회가 갖는 것은 종단 내에서 총무원장의 역할을 극히 제한하겠다는 의도였다.

통합종단 출범 과정에서 초대 총무원장으로 법륜사측 석진 스님이 선출된 것에 강하게 반발했던 조계사측이 입장을 선회해 다수의 중앙종회의원 수 확보에 공을 들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총무원장을 법륜사측이 맡더라도 중앙종회를 장악한다면 조계사측으로서는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다.

법륜사측은 즉각 통합종단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은 9월20일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통합종단 이전의 상태로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통합종단에서 부국장을 맡았던 법륜사측 스님들도 사퇴를 선언했다. 법륜사측은 이어 10월4일 조계사측을 상대로 ‘종헌 무효 및 효봉 조계종정 불인정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법륜사측은 또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을 설립하고 종정에 묵담 스님, 총무원장에 대륜 스님을 선출했다. 이로써 통합종단은 묵담 스님을 종정으로 하는 조계종(서대문측)과 효봉 스님을 종정으로 하는 조계종으로 다시 양분됐다. 이후 양측은 서대문측이 1970년 1월15일 한국불교태고종을 창립할 때까지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 통합종단이 발족한 직후, 종회의원스님들이 종단의 진로를 논의하고 있다. 사진출처=‘사진으로 보는 통합종단 40년사’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쥔 중앙종회는 1962년 12월26~30일 제2회 중앙종회를 열어 1963년도 총무원 예산을 542만 1100원으로 확정했다. 교육법, 포교법 등 종법제정안도 가결했으며,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의 사표를 수리하고 총무원장에 대한 보궐선거를 진행했다.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후임 총무원장을 3명의 전형위원이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해 무기명 투표를 통해 선출하기로 했다. 전형위원들은 법륜사측에서 종회의원으로 추천된 법룡, 혼성, 용명 스님을 후보로 추천했다. 투표결과 출석의원 34명 가운데 30표를 획득한 법룡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통합종단 탈퇴를 선언한 묵담 종정측의 반발을 무마하고 묵담 종정측 인사를 끌어들이려는 포석이기도 했다. ‘대한불교신문’은 1963년 2월1일자에서 “중앙종회가 총무원장에 대처측인 법룡 스님을 임명하고, 종회 부의장에 역시 대처측인 서각 스님을 임명한 것은 대처측에 대한 양보정책”이라고 보도했다.

법룡 스님은 1891년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태어나 190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초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보현사 강원에서 내전을 익힌 스님은 1912년 보현사 진상학교 보통과와 고등과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교토 임제대학을 졸업했다. 다시 국내로 돌아온 스님은 평북 영변의 오봉사 주지를 거쳐 1930년 보현사 주지를 맡았다. 보현사 주지 시절에는 후학 양성을 위해 매년 20~30명의 젊은 스님들을 선발해 일본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고,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보현사 주지를 맡은 터라 당시 불교계에서 스님의 영향력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9월 조선불교조계종 출범과 동시에 초대 서무부장을 맡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통합종단 조계종 내에서 스님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대처측 인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종헌종법의 틀에서 총무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종단 내 대부분의 권한은 종정과 중앙종회로 양분된 상태였다. 중앙종회는 종법 등을 제정하면서 각종 위원회의 대표자와 위원 임명 권한을 종정에게 부여했다. 심지어 신도단체 간부가 취임할 때도 종정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종단의 주요현안은 모두 중앙종회에서 논의됐고, 총무원은 중앙종회에서 의결된 내용을 처리하는 하급부서 정도에 불과했다. 더구나 총무원 산하 각 부서의 간부들은 모두 중앙종회에서 선출된 종회의원이었다. 이렇다 보니 총무원 종무회의에서도 총무원장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중앙간부의 인사권도 중앙종회가 가지고 있어 총무원 집행부 구성은 중앙종회의 몫이었다. 중앙종회에서 총무원장의 발언권도 극히 제한됐다. 중앙종회의원을 겸직했던 총무원 부장들과 달리 총무원장은 겸직금지조항에 묶여 중앙종회 논의구조에서 늘 배제됐다. 법룡 스님이 중앙종회에서 발언한 것이라고는 종정 효봉 스님의 교시를 대신 낭독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기형적 구조는 훗날 조계종 총무원장이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통합종단에서 이탈한 서대문측 조계종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전국의 사찰에서 효봉 종정측과 묵담 종정측(서대문측) 간의 ‘절 뺏기’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법정에서도 사찰소유권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다.

이 무렵 서대문측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1962년 8월부터 시행된 ‘불교재산관리법’이었다. 이 법은 불교단체 및 사찰의 등록, 주지 또는 대표자 등록을 의무화하고, 재산처분은 사전에 감독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불교단체가 이 법을 위반하거나 분규로 인해 이 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는 문교부 장관이 재산관리인을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도 부여됐다. 사찰재산의 망실을 막겠다는 목적이었지만 불교재산관리권과 그 관리인의 등록·인정여부를 국가에 부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교계의 자주권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법은 서대문측과의 갈등에서 효봉 종정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정부는 서대문측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불교(1963년 2월1일자)’에 따르면 문교부는 효봉 종정의 종단만을 합법적이고 통일된 종단으로 인정하고 등록을 접수받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서대문측은 정부로부터 정식 종단등록을 받지 못했으며 산하 사찰에 대한 등록도 번번이 무산됐다. 이런 까닭에 조계종은 ‘불교재산관리법’을 옹호했다. 중앙종회는 4회 종회(1963년 6월29일)를 열어 “조계종은 통합된 합법적 단일종단이므로 (정부는)이를 계속 지지해 주길 바란다”며 “현재 미등록된 잔여사찰을 조속한 시일 내에 등록을 필할 수 있도록 강력히 촉구해 주길 바란다”고 건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불교재산관리법으로 인해 서대문측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러나 1965년 6월11일 서울지법이 서대문측이 제기한 ‘종헌 무효 및 효봉 조계종정 불인정 확인’소송과 관련해 “비상종회가 종헌을 제정할 당시 위법사항이 있다”며 “종헌과 효봉 종정추대는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서대문측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훗날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결국 조계종의 승소로 결정됐지만, 서울지법의 판결은 당시 조계종에 큰 부담이 됐다. 총무원 집행부는 중앙종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총무원장 법룡 스님도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항소심에 만전을 기하라’는 취지로 반려했다.

1966년 3월11일 중앙종회는 제12회 종회를 열어 법룡 스님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새 총무원장으로 경산 스님을 선출했다.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이지만 법룡 스님은 석진 스님의 사임에 따른 보궐로 선출돼 임기도 전임자의 잔여임기로 종료됐다. 총무원장에 선출된 지 3년 4개월여만이다.

법룡 스님이 총무원장에 재임한 동안 조계종은 ‘도제양성, 전법, 역경’이라는 종단 3대 사업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종단 운영에 필요한 각종 제도도 마련했다. 1964년부터 스님들의 현대식 교육을 위해 동국대에 종비생을 파견했으며,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팔만대장경 한글화 작업에 착수했다. 신도단체가 속속 생겨났으며 이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그러나 이런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 중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총무원장 법룡 스님의 평가는 인색할 정도로 부각되지 않았다.

법룡 스님은 총무원장에 물러난 이후 1969년 11월23일 입적할 때까지 수원 봉녕사에서 주석했다. 조계종 2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스님이었지만, 자신을 시봉할 상좌도 따로 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스님을 시봉한 것은 범어사 문중의 흥교 스님이었다.
흥교 스님은 “광덕 스님이 어느 날 연락해 법룡 스님이 상좌도 없이 홀로 지내고 계시니, 가서 간병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해 시봉하게 됐다”며 “법룡 스님은 온화하면서 따뜻한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또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제일 부유한 사찰이었던 보현사 주지를 10년 넘게 맡으면서도 삼보정재를 허투루 쓰지 않았고, 후학양성에 앞장섰던 선지식이셨다”면서 “통합종단출범 초장기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 발전의 토대를 닦은 분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법룡 스님은 불교정화라는 한국불교사의 혼돈 속에서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과 마찬가지로 대처측 인사라는 이유로 쓸쓸히 잊혀졌다. 심지어 현재 총무원에는 스님의 승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다. 불교정화가 남긴 또 하나의 상처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29호 / 2018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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