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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승법계도를 저술하다

기사승인 2018.03.20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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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승 요긴함과 중요함 포괄했으니 천년의 본보기 될 만하다

   
▲ ‘고려대장경’ 보유판 권45에 수록된 반시.

의상 스님은 지엄 스님 문하에서 ‘화엄경’을 중심으로 7년간 연학하고 44세 되던 해인 668년에 ‘화엄경’과 ‘십지론’에 의거하여 ‘반시’(‘일승법계도합시일인’)를 지었다. ‘반시’는 이에 대해 의상 스님 스스로 주석한 ‘법계도기’와 합하여 ‘(화엄) 일승법계도’로 유통되고 있다. ‘일승법계도’의 저술은 스승인 지엄 스님의 영향과 엄격한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지엄의 문하에서 7년 수학
화엄과 십지론 의거해 저술

지엄, 의상 스님에게 ‘의지’
법장 스님에 ‘문지’ 호 내려

법성게를 법계도인과 합해
반시라는 그림으로 완성해

법계도인 54각으로 구성
선재동자 54선지식 상징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친저자에 대한 이견도 있어

최치원, 균여 스님 기록에서
의상 스님, 친저자임이 확인


지엄 스님은 당시 융성하던 불교교학을 두루 섭렵하고 ‘화엄경’을 소의로 화엄사상의 기초체계를 마련하였다. 저술은 20여 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 뜻은 풍부하면서도 문장은 간결하다는 의풍문간(義豐文簡)으로 유명하다.

지엄 스님은 27세 되던 해 육상의 도리가 중요함을 염두에 두고 60권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5권)를 지었다. 또 ‘육상장’을 남겼으니 아주 간략하지만 화엄종의 육상원융 사상의 틀이 되는 중요한 글이다. 58세 이후 저술로 보이는 ‘오십요문답’(2권)은 화엄교학의 중요한 이치를 53가지 문답형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 법성게를 담았던 법계도인.

그리고 62세 이후 만년작으로서 지엄사상의 원숙함을 보여주는 ‘공목장’(4권)은 144개의 문항을 시설하여 일승화엄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 ‘공목장’은 의상 스님이 그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고 있을 때 이루어졌으므로 ‘일승법계도’ 저술에 더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의상 스님은 스승으로부터 의지(義持)라는 호를 받았고, 의상 스님과 함께 공부했던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은 문지(文持)라는 호를 받았다. 법장 스님은 글에 달통하였고 의상 스님은 의리에 밝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법장 스님은 스승의 입적 후 출가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고 스승의 뒤를 이어 중국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다.

이처럼 지엄 스님은 화엄사상의 기초적 체계를 마련하였는데, 후에 해동화엄초조가 된 의상 스님과 중국화엄종조가 된 법장 스님의 스승인 사실만으로도 널리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하겠다.

의상 스님은 의지라는 호에 걸맞게 화엄의 의리를 ‘법성게’ 30구를 포함한 ‘반시’에 함축시켰다. ‘법성게’는 구불구불 한 줄로 이어진 ‘법계도인’과 합해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이라는 ‘반시’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다.

이 ‘반시’를 지은 목적은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이름 없는 참 근원[無名眞源]으로 되돌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 중국 지상사에 있는 의상조사 화엄수학찬정법성게 기념비.

“무릇 부처님의 선교는 일정한 처방이 없고 근기에 따르고 병에 따라서 동일하지가 않다. 미혹한 자는 자취에 매달려서 본체를 잃는 줄 모르므로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여도 근본[宗]에 돌아갈 기약이 없다. 그리하여 이(理)에 의거하고 교(敎)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를 지어서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무명진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한다.”

여기서 이름 없는 참 근원은 일승화엄으로서 곧 법성이다. ‘법성게’에서는 이를 또 본래 고요한 자리로서 법계이며 집이며 실제이고 중도 등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법성에 돌아가는 귀법성가(歸法性家)이다. 귀법성가는 궁극적으로 법성을 증득하는 것이고 일승화엄법계에 들어가는 입법계(入法界)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의 ‘일승법계도’를 다음과 같이 극찬하고 있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어 일승의 요긴함과 중요함을 포괄했으니 천 년의 본보기가 될 만하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그밖에는 지은 것이 없으나 솥[의 국] 맛을 아는 데는 고기 한 점이면 충분하다. ‘법계도’는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되었다. 이 해에 지엄 또한 입적했다.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꺾음과 같다.”

이처럼 일연 스님은 ‘솥의 국맛’ 비유로 ‘법계도’가 온전히 일승화엄의 세계임을 밝히고, 또 ‘공자의 절필’ 비유로 지엄 스님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의상 스님의 ‘법계도’의 의미를 드높이고 있다.

그런데 의상 스님은 ‘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법계도기’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피력하고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지은 사람[集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답]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반면에 저술의 시기는 총장 원년 7월15일이라고 연월일까지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스승인 지엄 스님이 입적하기 약 3달 전 일이었다.

[문] “무슨 까닭으로 해와 달[年月]의 이름이 있는가?”
[답] “일체 모든 법은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려는 까닭이다.”

모든 법은 연으로 생겨난 연생법이라는 것과 연으로 생겨난 모든 법은 주인이 따로 없음을, 반시의 저술시기와 저자의 이름 언급 여부를 통해 함께 보이고 있다.

   
▲ 기념비 뒤에 새겨진 법성게와 법계도인.

발문에서는 이어서 연생의 연은 전도된 마음으로부터 오고, 전도된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명은 여여(如如)로부터 오며, 여여는 스스로의 법성(法性)에 있음을 밝히고 그 도리를 무분별 중도로 연결시키면서 발원문으로 발문의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처럼 법성에 의해 연생의 법이 생겨나므로 연생 제법에 주인이 따로 없다고 하여 의상 스님은 굳이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이름 없는 법성을 강하게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 법성에 대한 노래가 ‘법성게’이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관계로 후에 ‘반시’의 친저자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 않았다. 고려 균여(均如, 923~973) 스님은 ‘일승법계도’를 주석한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저자에 대한 이설을 소개하면서, 결론적으로 ‘일승법계도’의 저자는 의상 스님인 것으로 확언하였다.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소개한 최치원(857~908)의 의상전에서 전하는 의상 스님의 꿈 이야기는 ‘일승법계도’를 저술함에 있어서 의상 스님의 의지와 능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꿈인즉 매우 건장하고 신이한 사람이 의상 스님에게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다른 이에게 베풀어줌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또 선재(善財)에게서 총명약 10알을 받고, 청의동자에게서 비결을 받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번의 꿈 이야기를 들은 지엄 스님이 의상 스님에게 “멀리까지 와서 부지런히 수행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니, 오묘함을 보아 얻은 것을 편차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승장’ 10권을 편집하여 하자를 지적해주기를 청하자, ‘의리는 매우 합당하나 글(文詞)이 옹색하다’는 평을 받고 번거로운 곳을 삭제하고 윤문하여 ‘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 이름 했다.

지엄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성인의 뜻에 합당함이 있다면 타 없어지지 말기를 발원하고 그 글을 불속에 넣었다. 의상 스님은 타지 않고 남은 210자를 주워서 수일 만에 30구 게송으로 엮었다고 한다.

체원(體元) 스님이 1328년에 집해한 ‘백화도량발원문약해’ 에서도 최치원의 본전에 의해서 남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즉 의상 스님이 ‘법계도’를 지어 바쳤더니 지엄 스님이 보고는 ‘법성(法性)을 궁극적으로 증득하고 부처님의 뜻[意旨]을 통달하였다’고 찬탄하면서 그에 대한 해석을 지으라고 권하였다. 의상 스님이 해석을 지어 합해서 한 권으로 만든 것이 지금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의상 스님에게 총명약 10여 알을 주었다는 선재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이다. 법계도인이 구불구불 54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선재동자가 만난 54선지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의상 스님은 ‘입법계품’에 대한 주석인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최근에 중국 운거사(雲居寺)의 ‘방산석경’ 가운데 지엄 스님이 지었다고 새겨진 [智儼師造] ‘반시’(서문 포함)가 발견되어 또 다시 그 친저자에 대한 설왕설래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이를 계기로 ‘일승법계도’의 저자가 의상 스님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상기하게 되었다.

현재 지상사에는 “의상 조사가 화엄을 공부하여 법성게를 지어 바친 기념비”[義相祖師 華嚴受學撰呈法性偈 紀念碑]가 모셔져 있다. 불기 2551년(2007)에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지관) 스님이 주관하여 세운 것이다.

몇 년 전에 ‘화엄경’ 공부모임인 ‘화엄강회’ 스님들과 중국화엄오조사찰을 순례하던 차 지상사에 가보니 의상 스님의 ‘비(碑)’가 건물사이 처마 밑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주지 스님에게 ‘비’를 좀 편안한 자리에 모셔달라고 청하고 왔다.

지난해에 다시 ‘화엄강회’ 주관으로 사부대중과 함께 ‘의상루트를 따라서’ 차례로 밟아 지상사를 참배하였다. 불사중이라서 주변이 어수선했으나 ‘비’가 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마당에 옮겨 모셔져 있었다. 화엄오조비[法界宗五祖碑]도 두기에 합해서 법당 앞마당에 세워져 있었는데 앞으로 좀 더 다듬어 다시 모실 것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지엄 스님이 주석한 도량에 ‘법성게’와 ‘법계도인’을 새긴 의상 스님의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일승법계도’ 친저자 시비 종식의 여부 면에서도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32/ 20183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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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스님 jeo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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