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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코드로 읽는 불교

기자명 이필원
  • 기고
  • 입력 2018.04.10 14:33
  • 수정 2018.04.12 17:48
  • 댓글 0

특별기고-이필원 동국대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이필원 동국대 파라미타칼리지 교수가 4월10일 법보신문에 ‘인문코드로 읽는 불교’를 보내왔다. 이 교수는 기고문에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철학, 문화, 종교, 사상,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불교가 언어를 진리의 하나로 파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며 “인문코드로서 언어를 이해할 때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인문학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이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고도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하는 모든 학문은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리학을 하든, 컴퓨터 공학을 하든, 생물학을 하든 그것은 인간을 베이스에 놓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배제한 학문이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불교 역시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럼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문학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학적 연구라고 한다면, 그 본질은 인간이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본질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세계를 해석할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답을 얻게 된다. 바로 ‘언어’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본질은 언어에 대한 탐구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정보전달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언어철학에서 말하는 언어의 기원과 가치, 언어 속에 내재된 심리적 혹은 사회적 요소에 중심을 둔 사적 연구와는 또 다른 측면을 의미한다.

“인문학의 본질은 언어이다.”

인문학의 본질을 언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인문학을 인문학으로 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란 의미와 같다. 그렇다면, 언어를 일종의 코드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인문학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인문코드’라는 용어에 주목한다. 인문코드(Humanities Code)는 신조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의 명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인문코드는 언어이다.”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관심과 공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관심과 공감은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전달된다. 그렇기에 언어를 떠난 인문학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 맺으며, 세상을 본다. 결국 언어는 인식의 틀이며 해석의 내용이며,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래서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에 대한 이해도, 타인과의 관계 맺기도, 세상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불교에서 언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본다. 진리를 드러내는 두 가지 용어가 있는데, 하나는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진제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드러내는 세속적 진리란 의미의 세속제이다. 불교는 언어를 속제라는 범주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중론’의 ‘관사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모든 부처님은 이제에 의지하여 중생들을 위해 설법을 하신다. 하나는 세속제로써, 둘은 일의제로써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제에 대해 분별하여 알지 못하면, 곧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된다./ 만약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第一義)를 얻지 못하게 된다. 제일의를 얻지 못하면 곧 열반을 얻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한 세속제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진리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성제, 팔정도, 오온, 12처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온도, 사성제도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진리 그 자체인 제일의제, 즉 진제는 언어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또한 진제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언어는 곧 진리를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코드는 속제이다.”

언어를 속제로 본다는 것은 언어철학이나 언어분석, 언어 심리학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이해이다. 이는 개별학문이나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학”을 드러내는 용어가 된다. 인문코드가 언어이고, 언어는 속제로 이해된다는 것은 인문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체성과 관련된다. 하지만 손가락과 달의 비유에서처럼, 손가락은 세속제로서 언어이며, 달은 진제인 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언어는 코드이지만 진리자체가 아니다.

“인문코드는 언어이다.”라는 명제는 세속제와 진제의 이제설의 현대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언어의 사용과 교육은 다시금 반성되어야 한다. 언어는 단순하게 정보를 전달하고, 감정을 토로하는

▲ 이필원 동국대 교수
기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인문코드로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언어를 통해서만 철학과 문화와 종교, 사상, 역사 등이 그 나름의 의미와 내용체계를 갖게 된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철학, 문화, 종교, 사상,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불교가 언어를 진리의 하나로 파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인문코드로서 언어를 이해할 때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만큼 이제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하고, 교육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있는 것 같다. 이는 곧 언어교육과 사용을 통해 어떻게 하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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