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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웁팔라반나 ②

기자명 김규보

‘남편이 데려온 부인이 딸이라니…’

‘어찌 나에게 이토록 더럽고 추악한 일이 들이닥쳤단 말인가.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저 달빛에 몸을 녹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생각할수록 기막힐 뿐이어서 차라리 집을 나가 모든 걸 망각해 버린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싶었다. 하지만 담장 너머 아득한 밤거리를 바라보던 웁팔라반나의 눈에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울던 딸은 어느새 곤히 자고 있었다. 지금 집을 나가면 지옥 같은 이 집에서 딸이 홀로 남겨질 게 뻔하다. 밤거리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던 웁팔라반나는 결심했다. 딸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견뎌보겠다고, 그때까진 오로지 딸만 생각하며 버텨보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어머니와 남편 부정 알았지만
딸만 생각하며 7년 참고 견뎌
빈손으로 집 나와 길 헤매다
상처 감싸준 거부상인과 결혼

지옥 같은 집에서 지옥 같은 세월이 흘렀다. 딸이, 아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엄마와 남편은 수시로 정을 통했다. 눈감고 살아보려 해도 마음까지 닫을 순 없었다. 웁팔라반나는 숱한 밤 동안 가슴을 쥐어뜯으며 차오르는 울분을 삭여야 했다. 엄마와 남편을 더는 예전과 같이 대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그 더럽고 추악한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없었다. 행여 두 사람이 알게 되어 시끄러워지면 소문이 퍼질까 무섭고 두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숨죽여 사는 웁팔라반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딸의 웃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곱게 자라 주었다.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잠든 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제 일곱 살이 되었으니 홀로 남겨지더라도 흔들리지 말거라. 웁팔라반나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으로 집을 나서 정처 없이 길을 헤맸다. 엄마와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다 잊고 편히 살 줄 알았건만, 남겨 두고 온 딸의 모습만 더욱 선명해졌다. 7년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혐오감은 이제 죄책감이 되어 웁팔라반나의 마음을 옥죄었다. 여러 날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떠돌다 문득, 이대로 몸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웁팔라반나는 길가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자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주인인 듯한 이를 데려왔다. 그는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마을 최고의 부자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웁팔라반나에게 다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데려왔소.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슬픈 얼굴이라는 게 마음을 아프게 하오. 나와 결혼해 준다면 그 슬픔을 거둬내 주겠소.” 너무나 갑작스러워 거부했지만 평소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상인의 진심에 감동하여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 남편이 된 상인은 웁팔라반나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고자 정성을 다했다. 상처가 조금씩 지워져 갔다. 다시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웃 마을로 여행 갔던 남편이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며 젊은 여자를 데려왔다. 우연히 보았는데 첫눈에 반해 결혼식까지 올렸다는 것이다. 서운했지만 남편처럼 거부가 두 번째 부인을 맞는 것이야 흔하디흔한 일이어서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토록 착한 남편이 첫눈에 반해 자신을 두고 다시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던 그 여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사리로 가린 얼굴에서 수줍은 눈빛만 아롱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니 우리만 잘 지내면 될 걸세. 자, 얼굴을 보여주게나. 우리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해 보세.”

그의 가냘픈 손가락이 사리를 벗겨냈다. 젊고 아름다웠다. 아…. 순간 웁팔라반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도드라진 상처가 잡혔다. 딸…. 남편의 두 번째 아내는 두고 온 딸이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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