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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고대불교 - 무격신앙과 불교의 습합 -하

무속의 신들이 불보살로 대체되고 무격의 기능도 스님들이 대신해

▲ 대구 파계사 산령각(山靈閣)의 측면 모습.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된 파계사 산령각은 전통 민간신앙이 불교에 습합(習合)되어 나타난 전각 중 하나로 화려한 꾸밈을 엿볼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한국 재래의 무격신앙(巫覡信仰)은 불교와 같은 일정한 경전이나 체계적인 교리가 없으며, 주술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직화된 교단도 없으며, 그 제의(祭儀)가 사회적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국시대가 되면서 공동체의 성격이 변하였고, 또한 교의체계를 갖춘 세계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무격신앙이 차지했던 지위를 불교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의체계가 없는 무격신앙
세계종교 불교에 지위 넘겨

불교는 무신론의 종교지만
토착신을 호법신으로 포용

스님, 현세이익 축원하는 건
무격의 기능이 습합된 결과

호국법회 백고좌·팔관회도
본래는 무격신앙의 전통

삼국시대 중요한 사찰들은
소도같은 신성지역에 건립

신성시했던 전국 명산들도
불보살의 상주처로 탈바꿈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주류적인 종교의 교체에 그치지 않고,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원래 무격신앙은 현세에서 재앙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세긍정적인 종교다. 그런데 새로 전래된 불교는 현세를 덧없고 유한한 고통의 세계로 보고, 거기에서 영원히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의 종교였다. 따라서 무격신앙은 현실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데 견주어 불교에서는 세속적인 욕망의 절제를 요구한다. 이로 말미암아 내세관도 다르다. 무격신앙이 사후세계를 현세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계속설(continuance theory)의 입장인 것과 달리, 불교는 극락과 지옥이 분화되어 있고 생전의 행위가 사후의 존재 형태를 결정한다는 응보설(retribution theory)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교 전래 초기에는 무격신앙의 불교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나, 특히 신라에서는 무격신앙과의 마찰로 불교 수용이 순조롭지 못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늦어도 19대 눌지마립간대(417〜458)부터는 불교가 전래되어 오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공인된 것은 100여년이 지난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이차돈(異次頓)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순교를 당할 정도의 희생을 치른 다음이었다. 그러나 무격신앙은 불교의 공인을 계기로 하여 주류적인 위치에서 밀려나 점차 전통문화로서 기층사회에 침전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불교와 습합되면서 무격신앙의 내용이나 성격 자체도 전반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서 불교적으로 정리되고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재래의 무격신앙은 불교신앙으로 대체되거나 불교신앙의 범주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재래의 무격들이 담당하던 기능을 불교승려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또한 재래의 신들에게 불교식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 신들이 거쳐하는 신성한 지역도 불교적으로 성역화 되었다. 그것은 불교가 무격신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보편적인 세계종교였고, 또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때에 토착의 이질적인 신앙이나 생활습속을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모두 섭수하여 융화하는 포용적인 성격이 강한 점 때문이었다.

원래 불교는 절대적인 신앙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의 입장이었으나, 후대에 힌두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힌두교 신들의 개념이 불경에서 보살의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힌두교의 신들이 불교의 호법신으로 포용되었다. ‘화엄경’을 예로 들면 산·들·호수·하늘·바다·바람·불·밤·낮 등을 주관하는 신들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범신론적인 경향은 더욱 확대되어 세상 모든 사물이 각기 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불교의 고차원의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와 함께 이러한 범신론적인 성격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그 지역의 토착적인 신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불교의 이러한 성격은 하나의 신만을 고집하는 유일신교와 달리 한국에 수용되면서 토착적인 무격신앙을 포용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던 것이다.

불교 공인 뒤에 불교승려의 직능 중 하나는 질병을 고친다든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개인의 현세적 이익을 비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무격의 기능을 불교승려들이 대신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불교승려들의 직능은 국가의 발전과 왕권의 강화를 기원하는 호국법회인 백고좌회(百高座會)나 팔관회(八關會)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제사장의 역할을 불교승려들이 대신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도 특히 팔관회는 ‘불설팔관재경(佛說八關齋經)’에 의하면 재가신자가 8계를 받고 하루밤낮 지키는 법회로서 본래 금욕적·수행적 의의를 갖는 불교적인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에서 개설된 팔관회의 실제 내용은 삼한(三韓)에서의 10월의 추수감사제와 선랑(仙郞)의 가무(歌舞) 등을 융합한 종합적인 문화제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의례가 불교적인 의식으로 바뀐 것으로 호국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진흥왕 33년(572)에 전사한 사졸들을 위하여 7일 동안 팔관회를 베풀었던 것이나, 고려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서 팔관회는 천령(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 등의 토속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 것 등은 바로 팔관회의 성격과 그것을 주관하는 불교승려들의 역할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또한 승려들 가운데는 무격들의 주가(呪歌) 대신에 향가를 지어 주술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 불교에 있어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았던 것이나, 선덕왕(善德王)·진덕왕(眞德王) 등 여왕들의 즉위도 여성이 담당하였던 무격이나 제사장의 전통의 계승에서 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승려를 부르는 “중”이라는 칭호가 본래 무(巫)를 뜻하던 옛말인 차차웅(次次雄), 또는 자충(慈充)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불교승려들의 무격적 역할과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부락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믿어졌던 각처의 산악이나 대천의 신들에는 각기 부처나 보살의 이름들이 붙여졌고, 곡모적(穀母的)인 지모신(地母神)도 관음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것은 국내의 유명한 산악이나 대천 등의 신과 새로 들어온 부처나 보살(때로는 도교의 신선이 가미되기도 하였다)이 습합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부처나 보살은 본지(本地, 本身·本體), 여러 산악신이나 대천신은 수적(垂迹, 權現·妙用)으로 하여 국내의 여러 산천에 각각 배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본지수적설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보살은 바로 관음보살로서 이 보살은 때와 장소에 따라 갖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국가나 개인의 현실적 고통을 해결해 줄 것이 기대되었다. 원래 본지수적사상은 ‘법화경’ 수량품의 본문(本門)·적문(迹門)의 사상에 근거하지만, 그것이 변용되어 불교신앙이 무격신앙과 습합하여 토착화하는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본지수적설의 전통은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져 단군신화의 환인(桓因)이 제석천(帝釋天)으로 해석되고, 묘청의 팔성당(八聖堂)에서의 8성인이 산악신과 불보살·신선이 습합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일연은 환인을 제석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일연이 제석이라고 주석한 환인의 의미 자체가 사실은 불교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단군신화의 내용이 불교적으로 윤색된 것은 일연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의 기록 단계에서부터 이미 나타났던 것이었다. 즉 환인은 산스크리트어의 Ṥakrodevend ra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또는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인드라(因陀羅, Indra)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인드라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 제(帝)이며, 석가라(釋迦羅, Ṥakr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석(釋)이기 때문에 환인과 제석은 결국 인드라의 다른 번역에 불과한 것이다. 인드라는 불교이전부터 고대인도에서 숭배되고 있던 천(天)의 주신이었던 것인데, 불교신앙체계 속에 수용되어져 수미산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면서 사방을 진호함과 아울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된 것이다. 이 제석에 대한 신앙은 불교와 함께 수입되어 일찍이 신라시대이래 왕실의 중요한 불교신앙으로 받들어져 왔다. 단군신화에서의 환인이란 단어는 본래 하늘님, 또는 천신의 의미를 갖는 한국 고유의 말이 있었을 것이나, ‘고기’나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에 기록되는 과정에서 당시 유행되던 천신의 뜻을 가진 환인, 또는 제석이라는 불교용어로 바뀌어 표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본지수적설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에 불국토설(佛國土說)이 있었다. 불국토설은 신라가 원래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나라라고 관념하였던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국도인 경주의 전불시대(前佛時代)의 7곳 가람지설이었다. 즉 경주 소재의 천경림(天鏡林)·삼천기(三川岐)·용궁남(龍宮南)·용궁북(龍宮北)·사천미(沙川尾)·신유림(神遊林)·서청전(婿請田) 등 7곳의 사찰터는 전불시대의 7명의 부처가 일찍이 머물렀던 장소로 관념되었다. 7명의 부처는 곧 비바시(毘婆尸)·시기(尸棄)·비사부(毘舍孚)·구류손(俱留孫)·구나함모니(俱那含牟尼)·가섭(迦葉)·석가모니(釋迦牟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무격신앙의 신성지역(蘇塗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이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불교 공인 이후에 각각 사찰이 세워졌던 사실이 주목된다. 흥륜사·영흥사·분황사·황룡사·영묘사·사천왕사·담엄사 등인데, 이로써 삼국시기 경주 지역의 중요한 사찰은 모두 재래의 신성지역에 세워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무격신앙의 대상이었던 신들이 불보살로 대체되면서 그 장소도 바로 불교적으로 성역화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격신앙의 신성지역이 불교적으로 성역화되는 것은 경주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불교의 지방 전파에 따라 전국 각지의 명산들도 불교적으로 성역화되면서 부처나 보살의 상주처로 관념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 관음보살의 주처인 낙산, 법기보살의 주처인 금강산 등이었다. 이러한 자취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바, 산이나 봉우리의 이름 가운데 부처나 보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격신앙과 불교는 갈등과 공존의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종교습합현상(syncretism)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불교에 무격신앙의 요소가 들어오고, 무격신앙에 불교적 요소가 혼합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불교가 무격신앙과 습합되어 치병(治病)·기술(奇術)·양병(禳兵) 등의 기적의 연출과 점복(占卜)의 성행 등 미신적·주술적·현실긍정적인 신앙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무격신앙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면이 없지 않았으니, 이러한 기복적이고 현실긍정적인 신앙형태가 바로 한국불교의 하나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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