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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명강의-서울대 철학과 안성두 교수

일체중생을 향한 연민심이 세상과 공존하는 대승의 길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열반 아닌 세간서의 실천행
차별없는 대비심 발현해야
오만의 위험에 빠지지 않아

 

▲안성두 교수

 

오늘의 주제는 발보리심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발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깨달음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무상정득보리’라고 하는,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발보리심입니다. 오늘은 이 발보리심의 중요성과 그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보살은 범어 ‘보디사뜨바’의 한자 표기로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중생’이라는 의미와 함께 ‘깨달음을 향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이 사실 일상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대승의 초기 논서를 보면 오히려 일상을 방해하는 요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챙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해야 합니다. 이처럼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부딪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 즉 세간을 벗어난 어떤 것들과 관련돼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세간을 벗어났다는 것이 열반과 관련돼 있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이라는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과 연결돼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상정득보리, 즉 깨달음이라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이 매우 역동적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단순히 열반이라고 하는 안락한 세계로 초월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현세의 삶 속에서 실현돼야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세간과 출세간을 하나로 뭉뚱그린 다음에 그 속에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어떤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대승의 보살들은 두 가지 목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세간의 목표에 맞는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깨달음은 단순한 열반이 아니라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이 하나의 목표였습니다. 아라한은 번뇌를 끊은 자로서 사후에 바로 열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아라한과의 증득에 따른 열반은 안온하고 평화로운 목표점이었지만 대승불교도들은 이러한 아라한의 열반 대신 완전한 깨달음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 혹은 아비달마불교가 제시하는 열반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매우 경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아라한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꼼, 조롱, 경멸, 증오와 같은 태도가 매우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열반이라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는 성자들을 향해 ‘그들은 감옥에 갇혔다’며 ‘그들은 감옥 속에서 평화로울지 몰라도 더 이상 부처님의 지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가여운 존재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아라한의 성자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완전한 의미에서 에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아이든 공성이든 간에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중생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공성이나 무아라는 방식을 통합니다. 무아는 자아라고 생각한 것들이 개념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합니다. 공성의 방법도 강조됩니다. 대승에서는 공성을 일반적으로 무자성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무자성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도 그 고유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이름 부르는 모든 것들이 경험적 상황 속에서만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지, 저 대상을 분해하거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분석해 본다면 고유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부처님의 덕성조차 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체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조금 어렵지만 반드시 이해해야할 개념입니다.

그런데 대승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몰입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승불교도들에게 ‘완전한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망설임 없이 ‘일체 중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특정한 존재나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입니다. 편파적이지 않은 연민심을 개발하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할 때 깨달음의 내용은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에 대한 연민 없이 완전한 깨달음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심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잘 설명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도 대승불교의 유식학파를 일으킨 이로 무착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무착이 초기불교의 모든 경전들을 읽은 후 ‘반야경’을 읽었는데 도저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착은 미륵보살에게 가르침 받기를 발원하며 동굴로 들어가 3년간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3년 수행 끝에도 미륵보살을 보지 못했습니다. 절망한 무착이 동굴을 나오려는데 동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을 보고 ‘나의 발심이 부족했다’며 다시 동굴로 들어가 3년을 명상합니다. 하지만 무착은 여전히 미륵보살을 친견하지 못합니다. 3년이 지난 후 절망한 무착이 동굴에서 나오려는데 동굴을 드나드는 새들의 날갯짓에 단단한 바위가 닳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3년간 동굴에서 수행하지만 역시나 미륵보살을 친견하지 못합니다. 절망한 무착이 동굴에서 나와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무쇠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을 보고 무착은 동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3년이 지났습니다. 결국 무착은 12년의 세월을 동굴서 수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미륵보살을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완전히 절망한 무착은 동굴에서 나와 마을로 들어갑니다. 마을에서 무착은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봅니다. 그 개는 몸에 큰 상처가 났는데 상처에는 구더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냥 두면 그 구더기 때문에 결국 개는 죽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무착은 연민심을 일으킵니다. 무착은 개를 치료해주기 위해 한 벌 뿐인 옷을 작은 칼과 바꿉니다. 그 칼로 개의 상처를 도려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려고 보니 구더기가 죽게 생긴 것입니다. 개를 살리자니 구더기가 죽고 구더기를 살리자니 개가 죽는 것입니다. 결국 무착은 칼로 자기 엉덩이 살을 떼어내고 혀로 구더기를 옮겨 떼어낸 엉덩이 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개도 살리고 구더기도 살리기 위한 자기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미륵보살이 무착 앞에 나타납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한 무착이 ‘내가 그토록 친견하고자 했을 때는 나타나지 않더니 지금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나타나셨다’고 하자 미륵보살이 대답하시길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지 못하고 자비심없는 마음에서 진리를 보지 못한다’며 ‘그대가 나를 보고자 처음 발심했을 때부터 나는 그대 곁에 있었지만 자비심 없는 마음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며 이제 그대가 일체중생을 향한 대비심을 일으켰으니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일화가 대승불교의 공성에 대한 인식, 그것이 결코 대비심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대승도 이 두 가지를 벗어나서는 대승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선사가 일체중생에 대한 연민 없이 깨달음만으로 일체중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대승의 올바른 수용자라 할 수 없습니다.

발보리심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이 두 가지 토대 위에서 명상하고 이것을 삶 속에 받아들여 훈습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대한 우리의 동기는 너무 쉽게 흩어지고 오만이나 다른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발심 없이 완전한 깨달음은 없습니다. 대승불자를 불자로 만들어주는 시작은 발심이며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출세간을 눈앞에 두고 출세간의 삶의 가치를 세간의 삶 속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공존하는 길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의는 6월18일 부산 여래사불교대학이 마련한 안성두 교수의 특별 강좌 ‘발심과 이타행의 서원’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안성두 교수는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함부르크대 대학원 인도학과 석,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인문한국HK’ 지원 사업에 불교학계에서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불교학 분야 연구에 크게 기여해 왔다. 지난해 9월24일에는 행원문화재단이 시상하는 제21회 행원문화상 학술분야상을 수상했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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