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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광 불갑산 불갑사

기자명 김택근

백제에 불법 전한 성인의 마음이 붉게 타오른 그곳

▲ 사찰 중에 으뜸이라는 불갑사는 지금 온통 피안화(彼岸花)의 붉은 물결이다. 불갑사도 그간의 업장을 사르고 꽃대를 올리고 있다.

한가위가 지났지만 산하는 여전히 푸르다. 영광 불갑사(주지 만당 스님)를 만나기 전에 우선 법성포에 들렀다. 햇살 박힌 바닷바람은 따가웠다. 정확히 1630년 전 법성포에 내린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법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백제인들은 그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법성포 굴비거리를 빠져나와 불갑사로 향했다. 불갑사 가는 길은 정갈하고 예뻤다. 가로수 아래 붉은 꽃들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상사화였다. 9월에도 붉은 꽃을 보다니…. 여기저기 상사화축제를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불갑사 일대가 온통 상사화의 붉은 바다였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상사화가 피어 있었다.

침류왕 원년 384년 백제에 불법 닿아
법성포로 들어온 인도 스님 마라난타
불갑사 창건 직간접적인 인연 확실해

각진 국사, 천명 머물던 대가람 일궈
왕명으로 공덕 기렸던 비엔 세월 때

억불숭유·전란 거치며 쇠락한 도량
설두 대사 ‘비 맞는 사천왕’ 모셔와
천년고찰 기풍 되찾으려는 만당 스님
수행·정진·열반 뜻담은 5대 암자 복원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잎과 꽃이 함께 있지 못하고 잎이 다 없어진 후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핀다. 그런 만큼 상사화에 대한 많은 전설이 우리 주변 여기저기 피어 있다. 전설 속의 주인공들은 다르지만 내용은 유사하다. 어떤 사람을 숨어서 지독하게 사랑하다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상사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에서는 상사화를 피안화(彼岸花)라고 해서 귀하게 여겼다. 주지 만당 스님은 무성했던 잎들이 장마철 거센 비에 녹아 없어지고 꽃대만 올라와 꽃을 피우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라고 했다. 탐진치 삼독이 얽혀있는 욕망의 속세를 벗어나 해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불갑사는 ‘이뤄 질 수 없는 사랑’의 꽃 상사화 군락지다. 상사화는 삼독 얽힌 욕망을 벗어난 해탈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사화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붉은 꽃을 금선화(金仙花)라 하여 으뜸으로 쳤지요. 불갑사 일대에 금선화가 자생하고 있음은 어떤 인연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찰 중에 으뜸이라는 불갑사(佛甲寺)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산 자락에 있다. 하지만 거꾸로 불갑사란 절이 있기에 모악산을 불갑산으로 바꿔 불렀고, 불갑면이 생겼다. 또 영광(靈光)이란 불가에서는 마음의 광명을 뜻하니 군명(郡名) 또한 불갑사에서 유래했다. 불갑사는 인도 간다라 출신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라난타가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을 거쳐 왔으니 백제불교 초전성지인 셈이다. ‘삼국사기’는 마라난타가 백제 땅으로 건너온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9월에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들어오매 왕이 그를 맞이하고 궁에 두고 예경하니,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致宮內禮敬焉 佛法始於此).”

마라난타가 스스로 찾아왔다지만 왕이 영접했음을 볼 때 미리 초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제는 해양강국이었기에 승려 한분 모시고 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침류왕은 이듬 해 세상을 뜨는데, 치세 19개월 동안 왕의 주요 업적은 마라난타를 맞이하고 절을 창건한 것뿐이다. 마라난타가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라난타의 불갑사 창건설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혹 마라난타가 직접 창건하지 않았더라도 처음 불법을 전한 고승 마라난타를 기린 사찰임은 분명하다. 그가 들어온 곳도 ‘법을 전달하러 성인이 온 포구’라는 뜻에서 법성포(法聖浦)라 고쳐 불렀다. 고승 한 분이 세상을 바꿔버린 셈이다.

통일신라 원성왕 원년(785)에 행사존자가 중창, 고려 충정왕 3년(1350)에 각진 국사가 삼창(三創)했다. 각진 국사는 불갑사를 이름대로 으뜸사찰로 만들었다. 잇단 불사로 불갑사는 500여 칸의 거찰을 이뤘다. 법당은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다. 승방이 70개가 넘었고 암자가 31개였으며 1000명의 스님이 머물렀다. 이로써 불교계 종가(宗家)로 손색없는 면모를 갖추었다. 각진 국사는 왕명에 따라 말년에 불갑사에 주석했다. 젊은 날 수행승으로 불갑사에 3일간 머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예사롭지 않은 꿈을 꿨다. 깨끗한 풍모에 하얀 도포를 입은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스님은 마땅히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 세월이 할퀴어 알아볼 수 없는 각진국사비.

각진 국사가 이상하게 여겼는데 꿈 속 도인의 말대로 말년에 불갑사에 머물며 불사를 주도했다. 각진 국사는 백암사(백양사)에 잠시 머무는 동안 입적했다. 열반 당시 자색 구름이 가득 피어오르고 얼굴은 분가루를 칠한 것처럼 고왔다고 전한다. 제자들이 사리함을 불갑사로 옮겨와 모셨다. 왕명으로 비문이 지어졌으며 각진국사비가 지금도 경내에 서있다. 하지만 정유재란 등 전화에 그슬리고 세월에 할퀴어 비문은 알아볼 수 없다.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하며 불법을 이어왔던 불갑사는 정유재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타버렸다. 오직 전일암만이 남아있었다. 그 후 법릉, 해릉, 채은, 청봉스님 등이 중수를 거듭했다. 정유재란 직후에는 수온 강항 선생이 권선문(勸善文)을 돌려 법릉 스님을 도와 중수를 거들었다. 이곳 불갑면 출신 강항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포로임에도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왜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강항이 잡혀간 후 조선의 며느리는 날마다 불갑사를 찾아 시부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드렸다. 그 정성이 지극했다. 마침내 강항은 2년 8개월 만에 환국했다.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자신은 죄인이라며 모든 것을 물리치고 향리에 묻혀 살았다. 불갑사의 유일하게 남은 전일암에서 책을 읽으며 험했던 지난 세월을 씻었다. ‘모악산불갑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옛날 전성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복구하게 된 것은 수온 선생의 공이 크다.’
조선 말기 불교 탄압은 불갑사라고 비켜 갈 수 없었다. 유생과 토호들이 사찰에 난입하여 승려와 신도들을 괴롭히고 능멸했다. 또 이에 편승한 요승들이 득세하니 제대로 된 스님들이 절을 지킬 수 없었다. 절하는 이 없으니 절은 절이 아니었다. 폐사지에 다름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그때 설두 대사가 나타나 7창 중수를 했다.

설두 대사는 사천왕상을 전북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서 불갑사로 옮겨왔다. 여기에는 슬프고도 아린 사연이 스며있다. 연기사는 38개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가람이었다. 그런데 연기사 터가 명당이라서 전라감사가 탐을 냈다. 부친의 묘를 쓰려고 절을 비우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부처님 계신 곳을 인간의 유택으로 내줄 수는 없었다. 전라감사는 관군을 풀어 절을 접수하라 명했다. 관군이 재를 넘어 기어 올라왔다. 스님들은 목탁 대신 쇠붙이를 들고 죽기로 싸워 관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관군은 반대편 강을 타고 올라와 한밤중에 불을 질렀다. 울며 저항하는 스님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연기사는 연기로 사라졌다. 다만 사천왕상만 강가 갈대숲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불갑사 불사를 하고 있던 설두 스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사천왕은 비를 맞고 있었다. 사천왕이 말했다.

“우리는 연기사의 사천왕이다. 지붕을 씌워주면 가람과 삼보를 지켜주겠다.”

이상히 여긴 설두 스님은 ‘비 맞는 사천왕상’을 찾아 폐사지 연기사로 갔다. 연기사는 흔적도 없고 커다란 무덤만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정말 사천왕상이 강가 갈대숲에 빠져 있었다. 스님은 네 척의 배에 사천왕상을 나눠싣고 서해 바다로 나와 법성포로 들어갔다. 사천왕상의 몸집이 거대해서 불갑사까지 새로 길을 내야 했다. 그렇게 사천왕상은 연기사를 떠나와 불갑사를 지키게 됐다. 1876년의 일이다.

그 후 불갑사에는 적어도 전각이 불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 때에는 만세루를 태우려 군인들이 섶을 밀어 넣고 불을 붙였지만 손바닥 크기의 그을음만 내고 꺼졌다고 한다. 모두 사천왕상의 외호 때문이라고 여겼다. 현존하는 목조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사천왕상은 지금도 불갑사를 지키고 있다. 이를 기리며 불갑사와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에 사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 만당 스님은 으뜸 도량 면모를 되찾으려 한다.

불갑사는 1976년 수산 지종 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 다시 불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만당 스님이 1997년 주지로 부임하면서 천년고찰의 기품을 되찾기 위한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 만당 스님은 불갑사에서 출가한 이래 불갑사를 떠나지 않았다. 수산 스님은 제자에게 줄곧 ‘불갑사사적기’를 읽도록 했다.

실제로 만당 스님은 사적기를 줄줄 외우고 있다. 스님은 스승의 뜻을 이내 알아차렸다. 수산 스님은 과거의 사격(寺格)을 되찾겠다는 자신의 원력을 제자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만당 스님 또한 언젠가는 으뜸 사찰의 옛 모습을 되찾겠다는 서원을 했다. 우선 불갑산 일대를 샅샅이 뒤져 사적기에 적힌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31개의 암자 중 26개의 암자터를 찾아냈다. 스님은 원형을 찾아 차근차근 불사를 해나갔다. 만세루, 팔상전, 칠석각, 일광당, 대웅전을 보수했다. 또 명부전과 천왕문을 이전보수했다. 양진당, 염화실, 청풍각, 백운당, 범종루, 보장각, 조사전, 무량수전, 설선당, 금강문, 일주문, 선다루, 명경전 등을 복원했다.

특히 5대 암자를 복원, 또는 중수했다. 수도(修道)암, 오진(悟眞)암, 불영(佛影)대, 해불(海佛)암, 전일(餞日)암이 그것이다. 주지 만당스님은 5개의 암자에 의미를 부여했다.

‘열심히 정진하여(修道), 참되게 깨닫고(悟眞), 보림에 전념하여(佛影), 마침내 성불에 이르며(海佛), 해가 넘어가듯이 고요히 열반에 든다(餞日).’

▲ 불탄 연기사에서 불갑사로 모신 목조사천왕.

스님은 5대 암자를 순례코스로 만들 계획이다. 불갑사에는 나라의 보물인 대웅전(제830호), 목조 삼세불좌상(제1377호), 260여점의 불교 전적(제1470호) 외에도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다. 불상, 불화, 공예 전적 등을 몇 년 전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에 모아놓았다.

특히 대웅전은 1762년 소실된 이후 1764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이하게 불단의 방향이 정면이 아닌 측면을 향해 있다. 또 용마루 중앙에 용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보탑형의 장식물이 얹혀있다. 정면과 남측면의 꽃살문과 교살문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조선후기 사찰건축의 수작이라는 평이다.
지금 불갑사는 온통 피안화의 붉은 물결이다. 불갑사도 그간의 업장을 사르고 꽃대를 올리고 있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62호 / 2014년 9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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