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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는 승가 기본 이념에 어긋난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6.07.20 18:27
  • 수정 2016.07.21 10:41
  • 댓글 72

이자랑 교수 법보신문 기고
승가 고유 회의인 갈마에선
화합과 여법이 최고의 가치
다수보다 중요한 건 ‘여법’
세간 제도 도입하기 전에
전통 승가방식 검토해야

최근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제도와 관련해 중앙종회가 직선선출제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해 논의할 정도로 직선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가운데 초기불교교단사 및 율장 연구자인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가 7월20일 ‘직선제, 과연 율장의 이념에 부합하는가?’라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요즘 교계에서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 제도를 둘러싼 논의가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현행 간선제의 폐단이 제기되면서 직선제, 염화미소법, 종단쇄신위원회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각 제도에 대한 정확한 지지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개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직선제에 대한 선호도가 다른 제도에 비해 높은 것 같다. 특히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에서 직선제 옹호 발언이 적지 않게 등장하면서, 종단이 직선제 특위를 구성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특정 소수의 선거인단 투표로 인해 발생하는 부조리를 승가 혹은 교단의 구성원인 내 손으로 바로잡고 싶다는 사부대중의 열망이 느껴진다.

하지만 총무원장이라는 직책이 일반사회와는 다른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는 승가의 지도자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면, 일반사회의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지도자 선출에 관한 율장의 원칙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후세에 누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반드시 법과 율에 근거하여 답을 찾으라고 당부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율장에 의하면, 승가의 지도자는 갈마(羯磨)라 불리는 승가 고유의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지도자 선출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부터 분쟁 조정과 같은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승가의 모든 사안은 반드시 갈마를 거쳐야 한다. 갈마에서 내려진 결론은 갈마 진행 과정 자체에 대한 결함이 제기되고 입증되지 않는 한 절대로 번복할 수 없으며, 구성원은 반드시 그 결론에 따라야 한다. 즉, 올바른 절차를 거친 갈마에서 내려진 결론이야말로 승가를 이끌어가는 절대적 권위인 것이다.

그 중요성만큼 갈마가 갖추어야 할 조건도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원 출석’과 ‘만장일치’이다. 현전승가의 구성원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전원 동의로 결론을 내야 한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할 수 없는 자는 다른 승려를 통해 승가에 위임 사실을 알려야 하며, 반대 의견이 제기될 경우에는 다른 갈마를 통해 다시 다루게 된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승려들의 분쟁을 다루는 쟁사갈마든 일반적인 사안을 다루는 비쟁사갈마든 구별 없이 적용된다. 이를 통해 승가를 이끌어 가는 구체적인 힘은 바로 현전승가의 구성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갈마가 ‘전원 출석’과 ‘만장일치’라는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한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에서는 이 두 가지 원칙을 근거로 직선제를 합리화하는 발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평등하게 반영하여 사안을 결정하는 갈마의 의사 결정 방법이 매우 민주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직선제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전원출석’과 ‘만장일치’라는 갈마의 두 원칙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곡해한 의견이다.

갈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평등하게 반영해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만장일치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각자가 놓인 상황이나 이익 관계, 판단 능력이나 선호도 등에 따라 사람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평등하게 반영하여 항상 만장일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마는 전원 출석과 만장일치를 고수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이유는 승가의 ‘화합’을 위해서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여법(如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과연 직선제가 갈마의 이념을 살릴 수 있는 제도인지 깊이 숙고해야 한다.

율장에 의하면, 승가는 ‘화합승’이며, 화합승은 갈마를 통해 실현된다고 한다. 즉, 승가는 화합을 지향하는 공동체이며, 그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은 갈마의 실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마가 화합의 상징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구성원 전원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 다시 말해 만장일치로 갈마를 마무리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직선제의 경우를 먼저 보자. 직선제란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그 투표 결과에 따라 다수의 의견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다수가 지지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긴 다수는 만족스럽겠지만, 진 소수는 어떠한가. 물론 투표 전에 투표 결과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전제된다면, 소수가 당장 문제를 일으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도 없이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견이 버려졌다는 소외감이나 불만까지 해소해 줄 수는 없다. 불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표출될 것이며, 때로는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기도 한다.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갈마가 만장일치를 지향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소수가 느낄 소외감이나 분노에 대한 배려이다. 그 누구도 승가 운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능한 한 승가에 불화가 발생할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게 된다. 이 때문에 갈마는 화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화합과 한 쌍을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여법’이다. 갈마가 구성원 전원의 만장일치를 통해 화합 실현이 가능한 이유는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여법한 기준이 판단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흔히 구성원이 모두 모여 의사결정을 한다는 이유로 갈마를 난상토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중이 원하면 소도 잡는다’라는 말까지 더해지면서 마치 여러 사람이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론을 내는 것이 갈마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갈마는 반드시 ‘여법’이라는 방향성을 구비해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이 아닌, 여법하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명확한 조문이 필요한 것이며, 이 조문에 근거하여 대중을 이끌어 갈 총명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갈마의 진행을 맡게 될 갈마사의 조건으로 경과 율에 해박할 것, 행이 바를 것, 탐진치를 여읠 것 등이 거론되는데, 이는 상투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제도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모습.   법보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직선제는 어떠한가. 직선제는 대중의 자유로운 판단에 결론을 맡긴다. 그리고 다수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말 다수의 의견은 항상 옳은 것일까, 옳지 않아도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것일까? 경·율·논 어디에서 대중의 의견이기 때문에 옳다거나, 혹은 대중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설하고 있단 말인가. 100명 중 99명이 다른 의견을 말해도 단 한 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판단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설득해 가는 것이 불교의 입장은 아닐까.

불교는 고타마 붓다라는 개조가 있으며, 그 개조가 설한 가르침이 있다. 그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여법이다. 갈마는 바로 여법을 근거로 승가의 구성원을 화합으로 이끌어가는 장치이다. 갈마는 의사 결정을 위한 단순한 회의도 아닐뿐더러, 공의를 반영하는 민주적인 제도도 아니다. 너도 나도 똑같은 한 표가 아닌, 명확한 여법을 기준으로 총명유능한 지도자의 지도하에 가장 올바른 목표점을 찾아 서로 교화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를 통해 승가의 구성원은 깨달음의 세계로 함께 나아가는 화합승의 일원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승가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중의 토론이나 논의도 이 방향성을 상실하면 안 된다.

전원출석과 만장일치라는 갈마의 원칙에는 이처럼 화합과 여법이라는 승가 운영의 기본 이념이 담겨 있다. 다수의 의견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직선제는 여법이라는 기준과도, 화합이라는 가치와도 거리가 멀다. 직선제가 민주주의적인 제도라며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민주주의와 갈마는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민주주의는 평등에 가치를 두지만, 갈마는 여법과 화합에 가치를 둔다. 불교 역시 평등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승가의 일원이 된 이상, 출가 전의 계급 여하나 성별 등과 무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할 수 있고 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이지, 누구의 의견이든 다 N분의 1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은 아니다.

승가는 불(佛)과 법(法)과 더불어 불교의 삼보이다. 불과 법이 그러하듯이 승가 역시 일반사회를 교화하고 이끌어가는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승가의 구성원들은 일반사회의 민주주의를 동경하고 그 제도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다. 일반사회에서조차 최선이 아니라며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상황에 오히려 승가의 구성원들은 그 민주주의에 열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부대중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다수의 의사만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세간의 제도가 정말 승가에 어울릴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승가는 승가다운 모습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 일반사회의 제도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승가운영의 핵심 가치와 상치하는 제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행 간선제 그리고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염화미소법이나 종단쇄신위원회안도 화합과 여법이라는 갈마의 이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인식의 공유만 이루어진다면, 방법상의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사부대중이 원하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선출이라는 한 가지 사실이라면, 다수의 지지나 우연이 아닌 마지막까지 여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한 사람을 찾아내는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화합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문헌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승가나 교단을 형성해 온 불교도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세간을 넘어 출세간의 이상적인 경지를 지향해 온 불교도의 고뇌에 대한 검토도 없이, 또한 실행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세간의 제도를 도입하여 승가 고유의 전통과 질서를 훼손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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