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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국사 석가·다보탑의 명칭문제

기자명 주수완

중수기에 기록된 무구정광탑은 석가탑일까? 다보탑일까?

▲ 불국사의 두 탑인 석가탑과 다보탑의 이름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등장하는 석가모니와 다보불의 만남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석가탑의 원래 명칭이 ‘무구정광탑’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들 두 탑의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다.

1966년 9월13일, 불국사 석가탑이 도굴 당했다는 기사가 떴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상징과도 같은 석가탑의 도굴은 당시로서는 얼마 전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탄 것처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필자는 그 당시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도굴꾼은 자동차 타이어를 교환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리프트 잭으로 사리공이 있는 탑신을 들어 올려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사리장엄구 일부를 꺼내간 것으로 보이는데, 무리하게 들어 올린 탓에 석재가 일부 떨어져 나가고, 탑신이 뒤틀리면서 석가탑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1966년 10월 석가탑의 해체수리가 결정되었다.

1966년 도굴 후 파손 해체수리
당시 무구정경과 묵서지편 발견
2005년 묵서지편 보존처리 통해
석가탑 수리내역 알 수 있게 돼
고려 때까지 석가탑 명칭 없고
11세기까지는 무구정광탑 불려

석가탑에서 나온 탑 중수기가
다보탑의 중수기라는 설 제기
사실이면 명칭 문제 자연 해결
일본 소장 남산출토 금동사리함
사리기가 다보탑서 유출 가능성

하지만 그 당시의 장비란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나무로 된 전신주 기둥으로 비계를 급조하는 등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급기야는 해체되는 석부재를 지탱해야할 나무 전봇대가 부러지면서 부재가 곤두박질쳐 부서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유리로 된 사리기를 급히 옮기다 떨어뜨려 깨지는 사태까지 있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석가탑은 겨우 원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유명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한지 한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오랜 시간 엉겨 붙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일단 수습된 이 한지 뭉치는 ‘묵서지편’이란 이름을 달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되었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세상에서 잊혀져갔다.

이 묵서지편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40년 정도 지난 후였다. 1996년부터 한 덩어리로 엉켜있던 묵서지편에 대한 보존처리가 시작되었고, 이들이 낱장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10년 정도가 지난 2005년에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종이뭉치가 몇 개의 문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 1024년(고려 현종15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와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 1038년(정종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 ‘불국사석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 등 4개의 문건이 포함되어 석가탑의 수리 내력을 알려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당시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은 우리가 흔히 석가탑으로 알고 있었던 탑이 최소한 고려시대까지는 어디에서도 석가탑으로 불리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지게 된 점이다. 석가탑, 그리고 그와 짝을 이뤄 다보탑으로 불리는 두 석탑의 명칭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대승법을 설하시자, 다보불이 보탑과 함께 나타나 설법의 내용을 보증하셨다는 이야기다. 석가탑 이전에 이미 감은사, 사천왕사 등에 쌍탑이 세워졌지만, 그 가운데 석가·다보라는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불국사에서 유독 이런 해석이 등장했던 것은 물론 1708년 회인 스님이 정리한 ‘불국사사적’ 및 1740년 동은 스님이 저술한 ‘불국사고금창기’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문헌적으로 뒷받침되었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보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다보’라는 이름에 너무나 어울리는 화려하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탑을 다보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뭐라고 불러야한단 말인가 싶은 정도다.

그런데 문헌상으로는 ‘불국사사적’ 등이 저술된 18세기,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부터 불국사 석탑이 석가·다보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탑에서 발견된 문건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11세기까지는 이를 석가·다보탑으로 보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대신 무구정광탑, 혹은 서석탑으로 불려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비록 11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어느 틈엔가 이 두 탑이 ‘법화경’의 석가·다보불을 상징하는 탑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처음 불국사가 세워지고 이들 두 탑이 세워졌을 때의 의도는 석가·다보탑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황이 포착된 셈이다.

 
▲ ‘불국사무구정광탑 중수기’의 앞부분. 우측 하단 맨 오른쪽 줄에는 ‘무구광정탑’으로 써 있지만, ‘광’과 ‘정’의 옆에 있는 점은 순서를 바꿔 읽으라는 교정부호라는 설이 제기됐다.(위) 2008년도 다보탑 상층부 부분 해체수리. 중수기문의 앙련대·화예·통주는 이 상층부 부재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추정돼 저 안쪽에 사리공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리기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유출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아래)

석가탑 중수와 관련된 문건들은 보존처리가 끝나자 즉시 본격적인 해독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의 책처럼 차례대로 페이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어 붙인 한 장의 종이에 쓰여 여러 번 접혀 있다가 엉겨 붙었던 상황이었고, 중간 중간 사라진 부분도 있는데다가 몇 개의 문건이 뒤섞여 있던 것이라 그 종이조각들의 순서를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연구자들은 접혀있던 정황을 참작하여 한 조각 한 조각 퍼즐 맞추듯이 순서를 찾아냈다.

내용이 공개되자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되었다. 정확한 해독이 있기 전에는 석가탑 수리에 관한 4건의 문건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러 연구자들의 해석이 뒤따르면서 해독의 순서에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또 별개의 문건이었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가 사실은 하나의 문건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가 비록 석가탑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은 석가탑 중수기록이 아닌 다보탑 중수기록이라는 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설이 제기된 이유는 중수기에 등장하는 탑 부재의 명칭 때문이었다. 중수기의 문장 중에는 “태평 4년 갑자(고려 현종 15년, 1024년) 2월17일을 길일로 골라 정하여 탑을 해체하고 수미(須彌)를 아래로 내렸는데 앙련대, 화예, 통주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를…”이란 부분과 “쪼개졌던 제석(石)은 장수사(長壽寺) 통(筒)의 돌 하나와 불국사 남천의 돌 하나를 절의 스님들이 옮겨다 썼으며, 분복(盆覆), 화염(花焰), 유황(流皇), 사자(師子) 등의 돌은 동산 동쪽 칠전원(柒田院) 동쪽 통의 돌을 골라 깎아 만들었다”는 부분이 보이는데, 여기 등장하는 앙련대, 화예, 통주, 제석 등의 부재들은 아무래도 석가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부재라는 것이다.

이 부재들이 현재의 다보탑 부재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앙련대, 화예, 통주 등은 바로 다보탑의 상층부를 지칭하는 것이며, 거기에 사리가 봉안되어 있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론 이러한 부재명칭들이 석가탑의 상륜부 어딘가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석가탑은 비록 단순해 보여도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주, 용차, 보개, 수연 등 복잡한 명칭으로 현재 불리고 있다. 물론 현재의 상륜은 1960년대에 보수하면서 실상사 석탑의 상륜부를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므로 원래 석가탑의 상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들을 쉽사리 다보탑의 부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명칭만 보면 다보탑 부재에 더 적합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제석’은 계단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되어 다보탑의 계단 어디에 사용된 부재로 추정되었고, ‘사자(師子)’ 역시 ‘사자(獅子)’와 같은 의미로 다보탑의 돌사자상과 연관되어 해석되었다. 따라서 ‘무구정광탑 중수기’는 다보탑의 수리기록, ‘서석탑 중수형지기’는 석가탑의 수리기록으로 구분해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석가탑에서 나온 중수기를 다보탑 수리기록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반론도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단지 실수로 그 중요한 수리기록이 석가탑으로 섞여 들어갔단 말인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석가탑, 그것도 사리함 안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석가탑을 ‘무구정광탑’으로 간주했던 것인데, 만약 무구정광탑이 다보탑이라면 이마저도 원래는 다보탑에 봉안되었던 유물이란 말인가? 우리가 신라시대 사람들이 석탑 부재를 어떻게 불렀는지 정확히 모르는 이상 이러한 추정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석가탑에서 발견되었을 당시의 묵서지편. ‘무구정광탑중수기’ ‘서석탑중수형지기’ ‘석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 등의 문건이 뒤엉켜있는 상태이다.

혹시 다보탑에는 그 특수한 형태 때문에 아예 사리기를 넣을 공간이 없어서 처음부터 석가탑에 두 탑의 사리기를 함께 봉안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중수기 기록에는 99개의 소탑과 함께 사리를 순금제 병에 넣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병은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고 99개의 탑도 없었다. 만약 원래 순금병에 넣었다가 고려시대에 중수하면서 유리병으로 바꿨다면 석가탑 사리기는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고려시대 작품이 되어 버린다. 만약 중수기가 다보탑 수리내용이라면 순금제 사리병은 다보탑에 봉안되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이런 문제들의 해답은 결국 다보탑이 쥐게 되었다. 다보탑은 일제 강점기에 해체수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측도면에도, 기록에도 사리공이나 사리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황상 해체수리를 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공식적인 문건은 없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2008~2009년 사이에 다보탑이 해체수리 되었지만, 이는 상층부의 일부 부재를 해체한 것이고 전면적인 해체가 아니어서 사리공의 위치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 중에 경주 남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금동사리함이 있는데, 이 표면에 99개의 탑이 새겨져 있고, 또 기록에는 원래 금동사리병과 함께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 사리기가 바로 다보탑에서 유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과연 아직은 말이 없는 다보탑 안에는 어떤 유물이 봉안되어 있을까? 석가탑에서 나온 중수기가 다보탑의 것이고, 동경박물관의 사리기도 다보탑의 사리기라면 현재의 다보탑 사리공은 텅 비어 있을 확률이 높다.

과연 중수기에서 언급한 무구정광탑은 석가탑일까? 아니면 다보탑일까? 불국사의 창건자들은 정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석가탑·다보탑’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 무구정광탑이라는 것은 특수한 어떤 탑의 개념이자 명칭이었을까? 원래는 석가·다보탑이 아니었는데 이를 석가·다보탑이라는 멋진 개념으로 재포장한 아이디어는 누가 낸 것일까? 묵서지편의 퍼즐 조각은 맞춰졌지만, 그 역사의 퍼즐은 아직도 한창 맞춰지고 있는 중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54호 / 2016년 8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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