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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무등산 ② 석불암-규봉암-중머리재-증심사

‘산이 곧 절’인 무등서 궁극의 선묘를 찾다

▲ 지공너덜을 지나면 의상대사가 창건한 규봉암에 닿는다.

“암석 사이로부터 좁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가시덤불을 헤치고 덩굴을 부여잡으며 돌고 돌아 규봉암에 이르니 이것이 세칭 광석대이다. 넓은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수백 사람은 앉을 수 있다. 많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푸른빛으로 빽빽하게 서 있어 병풍 휘장을 두른 듯하였다.”(김순영 선생 역)

송광사 산문 나온 금명
“무등산은 천년 절”

의천의 펄떡이는 활구
“산과 바다는 고르다”

규봉암에 뜬 달
경 읽는 선재 비추리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에 기록된 ‘규봉암 가는 길’이다. 그렇다.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걸음 하면 규봉암이고 서쪽으로 향하면 증심사다. 원효사에서 출발 해 서석대와 입석대의 풍광을 감상한 후 장불재 쉼터로 내려온 나그네. 여기서 암자 하나를 끝내 포기 않고 두 사찰의 참배를 결정한다면 규봉암에 오른 후 다시 장불재 쉼터를 경유해야만 하는 수고스러움이 뒤따른다. 허나, 감내할 만하다. 깎아지른 푸른 빛 바위들이 사시사철 둘러치고 있는 암자라 하지 않는가!

▲ 장불재와 함께 중봉 또한 원효사. 규봉암, 증심사 세 절을 잇는다.

사람 두 명이 담소 나누며 걸을만한 산길이다. 하여, 가시덤불 헤치고 덩굴 부여잡을 일은 없다. 이제 광주는 시야서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나주와 화순이 들어온다.

석불암 앉아 있는 터에는 원래 염불암이 있었다. 그 암자 곁에 인도의 지공대사와 조선의 보조국사가 정진했다는 석굴이 있다고 들었다. 지공너덜을 지나야 규봉암에 닿을 수 있다. 무등산에는 정상 1187m 부근부터 해발 500m 사이에 길이 300m를 전후하는 두 개의 너덜지대가 있다. 증심사 방향의 덕산너덜과 규봉암 방향의 지공너널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지공선사가 무등산에 들어와 석굴에서 수행하며 야단법석을 펼쳤다. 대상은 설법은 이 곳 너덜지대에 퍼져 있는 암석들. 지공선사의 감로법문에 탄복한 바위들은 제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공 선사의 설법을 직접 들은 나옹선사는 이 곳을 ‘지공너널’이라 이름 했다. 일화가 전해져 후세 사람들이 보조석굴이라 일렀다.

▲ 석불암 석문은 한 여름의 토사로 닫혀 있다.

석불암은 직각의 벼랑 끝에 간신히 앉아 있었다. 암자로 들어서는 문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나는 석불암, 또 하나는 염불암. 암자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일주문이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에 합장을 올린다. 아! 그런데 엄청난 토사가 밀려 내려와 있다. 규봉암으로 이어지는 석문도 완전히 막혔다. 지척에 분명 석굴이 있을 터인데. 훗날 무등산 다시 오를 때 찾아 볼 일이다. 왔던 길 다시 되돌아 가 규봉암 길을 이어갔다.

 
▲ 석불암으로 들어서는 문 뒤쪽에는 '염불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암은 지리산 자락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절을 중심으로 남서에서 서북으로 뻗은 벼랑에는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서 있는 상서로운 돌기둥들이 가득했다.

고려 문신 김극기는 저 풍광을 보고 “바위 모양 비단 잘라 빚었고/ 산 형세 옥돌 쪼아 세웠다”고 감탄하며 “어찌하면 속세 그물 버려두고/ 가부좌하며 무생(無生)을 배울고”라 했다. 비경을 마주한 순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선심(禪心)을 표출하고 있다. 암자를 품은 무등산은 이렇듯 유학자들조차 선의 세계로 초대했다. 그러나 선미의 맛을 볼 수 있고 없고는 산에 들어 선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 한여름 오전의 빛을 안기 시작한 규봉암 일주문. 작지만 당장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다.

조선후기 학자 나도규도 이 산에 올랐다. 누군가 이 산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사암의 안타까움을 전하며 ‘이 땅을 황폐하게 할 수 없거니와 우물도 차마 버려둘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조선 땅에 유교의 진리(儒道)가 찬연히 퍼졌기에 불교의 해됨이 크게 배척되었오. 그러니 그 땅은 황폐해지고 물은 버려지는 것이오.” 그의 눈은 숭유억불 초점에 맞춰져 있다. 서석대의 풍광을 담을 눈은 가질 수 있어도 산이 간직한 차별 없는 ‘무등의 진수’는 보지 못하고 있음이다.

반면 저 아래 절 증심사에 머물고 있던 고경명은 한 스님이 ‘경쇠를 울리는 등의 절 의식으로 인해 불편함이 없느냐?’ 묻자 이렇게 답한다.

▲ 암자 뒤편엔 돌기둥들이 가득 들어 차 있다.

“그렇지 않소. 우리들이 세속에서 몸을 벗어나 잠깐 선경에 머물렀으니 맑은 밤에 깨어 있어 절로 잠을 잊은 것이오. 그런데 작은 종소리가 맑게 울리니 실로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닌지라, 이를 들음에 족히 깊이 살피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소.”(김순영 선생 역)

산사를 보는 두 사람의 견지가 확연히 다르다. 규봉암을 찾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도 암자 앞에 펼쳐진 풍광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 ‘마음을 깨닫게’ 한다는 증심사 전경.

“옛 성인 이곳에 이름을 남긴지라/ 올라보니 산과 바다 일체 고르네/ 그윽한 샘은 맑아서 사랑스럽고/ 서석형상 그려내긴 어렵도다/ 인간세상 믿지 못하니/ 세속 밖의 정만 더하네/ 어느 때나 공업을 세워/ 깊이 숨어 여생을 늙어갈거나”(임준성 선생 역)

산과 구름, 상서로운 돌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면서도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 비경을 자아내고 있으니 ‘올라와 보니 산과 바다 고르다(등임산해평 登臨山海平)’고 한 것이리라. 중중무진의 세계를 꿰뚫는 심안(心眼)을 소유한 고승대덕의 품격이 깃든 시 한 수다.

일주문으로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암자의 절경을 가슴에 담아 보았다. 상서로운 돌들이 연꽃으로 피어난 듯하다. 장불재를 지나 중머리재로 내려오면 증심사에 이른다.

초의의 법계와 다풍을 이은 근현대 고승 금명 보정 스님은 송광사에 머무르며 10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송광사 산문을 거의 나서지 않은 채 조계산에서 정진한 것으로도 유명한 금명 스님은 어느날 산문을 열고 무등산을 올랐다. 증심사서 지은 시 한 수가 일품이다.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자주 찾았던 문빈정사.

“무등은 천년 절이라/ 바람부는 다락에 달 아래 숲 / 찬 샘물 마치 비 쏟아지는 듯 / 사는 스님 마음이 맑아질 밖에/ 석등 불빛 긴 밤에 사라져 가고/ 옥풍경만 거문고를 연주하누나/ 지금 만약 산꼭대기 올라간다면/ 범계의 부처 말씀 들을 수 있으리” (임준성 선생 역)

산이 곧 절이라니! 선미 물씬 나는 한 수 아닌가!

물소리 가깝게 들려온다. 증심사(證心寺)사다! 김극기는 이 절에도 머물며 ‘증심사’ 한 수를 남기며 “뜰 앞의 잣나무는 푸르고/ 길가의 복사꽃은 붉도다(백수정전취 도화맥상홍 栢樹庭前翠 桃花陌上紅)”고 했다. 조주 스님의 ‘정전백수’를 차용한 시. 증심사 대웅전 앞 누대의 이름 취백루(翠栢樓)는 이 시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무문관을 열어 조주가 전한 화두를 잡아야 하나! 김극기 ‘증심사’를 마저 들어보자.

“어찌 밖에서 찾으려 힘 쓰는가/ 단지 마음 안에서 얻어야 할 터/ 경계 막히면 마음도 끝내 막히니/ 말을 잊어야 도가 통할 터/ 누가 이 절 이름 지었나/ 감춰졌던 오묘함을 홀로 궁구했구나”

규봉암에서 일었던 바람 장불재 넘더니 증심사 도량으로 들어찬다. 화두보다 바람을 안을 때다.

선교와 고금 제자백가에 능통하고 시서에도 일가견 있었다는 조선후기 고승 묵암 최눌 스님이 무등산으로 떠나는 스님을 위해 지었다는 시 한 수를 안고 무등산에 하산을 고했다.

“스님의 하명으로 떠난다 말씀하니/ 그대와 함께 사는 인연 다시 없겠지만/ 서석산 천봉우리 위에 뜬 달은/ 경 읽고 예불하는 우리 모두 비추리다”(임준성 선생 역)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임준성 논문 ‘무등산 사찰제영시 연구’
▲ 김순영 논문 ‘무등산 유산기 연구’ 

 

 

길라잡이

장불재에서 석불암을 거쳐 규봉암까지의 길은 완만해 1시간이면 충분하다. 규봉암 닿기 200m 전에 석불암으로 들어서는 이정표가 보인다. 다만, 석불암에서 지공너덜로 바로 이어지는 석불암 석문은 현재(2016년 8월) 산의 토사가 밀려 내려와 막혔다. 따라서 석불암을 참배했다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10여분 거리) 규봉암으로 향하는 산길로 다시 들어서야 한다. 장불재에서 중머리재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지 않아 겨울이 아니라면 크게 위험하지 않다. 중머리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들어선 직후 왼쪽을 보면 증심사 이정표가 있다.

장불재에서 규봉암을 참배한 후 다시 장불재로 돌아 와 중머리재를 거쳐 증심사 입구로 이어지는 하산길은 약 10Km. 5시간은 잡아야 다소 여유롭다. 증심사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54번 버스를 이용해 동구청에서 내려 1187번 버스로 환승해 원효사 입구(무등산 국립공원 버스 정류장)로 원점 회귀할 수 있다.

 

[도·움·말]

이것만은 꼭!

 
증심사 오백전: 증심사 대웅전과 지장전(地藏殿) 등 대부분의 전각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나 오백전(나한전)은 조선 초기 작품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광주 유형문화재 13호.

 

 

 

 
증심사 철조비로자나좌불: 오백전 옆 비로전 앞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약 90㎝.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131호다. 1934년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이운 해온 것이라고 한다. 보물 131호.

 

 

 

 

 
증심사 3층석탑: 고려 초기 석탑으로 광주 유형문화재 1호다. 오백전 바로 옆에는 1933년의 보수 때 탑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과 조선 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칠층석탑이 있다. 안타깝게도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6.15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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