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사바를 떠나 어디로 가려 할까

기자명 이미령

“헬조선 한국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지요”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한국보다 더 뜨거운 모로코 여행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로코는 북아프리카인지라 더위가 한국보다 더했고, 게다가 사하라 사막의 짧은 투어는 뜨거운 모래바람 때문에 극도의 인내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밤에는 사막 열기가 내려간다고 해서 그것 하나 믿고 버텼지만 웬걸요, 자정이 지나도록 사막은 계속 뜨거웠고, 새벽녘이 되어야 아주 조금 선듯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해가 뜨기 무섭게 열기가, 열기가….

현각 스님의 비판에 대해
공감과 반감 엉클어졌다는
성원 스님의 표현에 공감
스스로 점검하는 계기되길

‘8월에는 모로코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로구나’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지만 더운 나라는 더울 때 여행하는 것이 그 나라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터이니 이번 여행은 그럭저럭 좋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을 묻는다면, 저는 ‘물’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제 생애에 거의 2리터에 달하는 생수병을 통째로 들고 마신 적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열기 속에서 마신 뜨거운 민트차도 참 좋았습니다. 이슬람 여성들처럼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 열기를 피한 것도 즐거운 체험이었습니다. 여성들의 히잡이나 부르카 착용에 대해서 저 역시 반감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뜨거운 열기로 숨이 막히는 지역에서 며칠 지내다보니 그 또한 나름 살아가는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느 것이나 한편의 입장에서만 재단할 것이 아니라는 소박한 앎도 챙겼지요.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은 카사블랑카의 한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답니다. 노천카페에 앉아서 건너편 메디나의 모스크를 바라보며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도 구경하면서 뜨거운 민트차를 마셨지요.

대체로 불교국가를 다니곤 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문화권을 짧게 둘러본 여행이어서 좀 색달랐답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도 관심도 없는 그곳 사람에게 ‘붓다란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해야 한 적이 있었는데 아, 정말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무엇보다 영어가 짧은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신의 창조물이고, 그저 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무슬림에게 붓다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라는 것, 깨어난 자, 깨달은 자라고 설명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지식이나 지혜라는 것도 신의 예언과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무슬림들에게 ‘신의 뜻’이 아닌 어떤 다른 차원의 지혜를 말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신의 품이 아니고 또 어떤 경지를 바라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무슬림 앞에서 저는 제 영어가 짧고, 제 불교 이해력이 여전히 모자라고, 그리고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쉽고도 명확하게 들려주지 못하는 제 사고력과 상상력의 미천함에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그러면서 창조주, 조물주, 전지전능하신 신을 배제하고서 ‘완성’을 이야기하는 불교라는 종교가 인류 역사에서 정말 독특한 정신세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스님! 스님의 답장 속에 현각 스님 이야기가 담겨 있네요. 불교라는 세계에 몸을 담고 그 공부를 했고 그리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번 ‘파문’에 나름의 생각을 짧게라도 개진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늘 지니고 있었더랬지요.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린 그 분의 짧은 글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현각 스님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소회를 완벽한 구어체로 쏟아낸 것 같더군요.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문제점을 열거하기 보다는 두루뭉술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토로했지요. 그러다보니 대체 어떤 일들이 그동안 벌어지고 있었던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현각 스님의 글은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딱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제 마음에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난 느낌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스님께서 지난 번 편지에 “공감하면서도 반감하는 감정의 엉클어짐”이라고 표현하셨지요.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맞아요, 딱 그거였습니다.

무척 큰 공감과 지독하게 쓰린 반감.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서 많은 불자들도 저와 같은 느낌을 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각 스님도 지나치게 파문이 커지니 한국불교를 떠난다는 뜻은 아니라며 진화에 나섰다고도 하지요.

스님!

스님은 이번 일을 두고서 ‘아픔’이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현각 스님이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진정으로 아파하기를 바란다고도 말씀하셨지요. 한국불교와 조계종이 법답지 않다며 과감히 결별을 선언하신 ‘이국의 눈 푸른 스님’ 입장과, 그런 문제점을 똑같이 느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아니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토종 한국인 스님’의 입장 차이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설령 종단을 떠나고 심지어 불교를 버린다 해도 그들 모두가 이 땅을 떠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 땅이 그야말로 지옥이라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이 지옥 같은 땅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말로는 헬조선, 헬조선 하고 있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그래도 버티고 살아내야 한다는 절절함과 애정이 담겨 있다고 저는 봅니다.

떠날 능력이 없어서 못 떠난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떠날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화탕지옥 한국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지요. 설령 어딘가로 가면 그곳은 여법한 땅일까요? 올바른 땅일까요? 만약 그런 땅이 있다면 그곳 역시 그 여법함을 쟁취하기 위해서 뜨거운 피를 흘렸었겠지요. 그 덕분에 후손들이 그나마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일 테고요. 이민자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그런 것에 대한 반감도 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과 안락함을 쟁취하기 위해 피땀을 흘렸는데 이민자들은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고 한다는….

아, 스님. 지금 이 말은 참 조심스럽습니다. 서양 국가들이 저토록 안정적인 부를 누리는 데에는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착취한 이유도 있을 테고, 그로 인해 혼란과 파멸에 떨어진 나라 사람들이 결국 난민이 되어 흘러들어갔으니까요.

그리고 현각 스님을 일방적으로 매도한 듯 비춰질 수도 있겠네요. 제 마음과 달리 말이지요. 불교계는 자정해야합니다. 어찌 불교가 세상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가슴 아픈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 이 불교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다음 편지에 조금 더 이어서 말씀을 드릴까 해요. 괜찮겠지요.

스님, 제주도에로의 초대, 고맙습니다. 언제고 꼭 한 번….

이미령 드림.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