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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충주 미륵세계사-미륵대원지-대광사-하늘재

미륵불이 품은 신라 마지막 태자 김일을 만나다

▲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은 하늘재를 넘는 순간 미륵불과 절을 세웠다. 그는 미륵불 앞에서 신라 재건의 원을 세웠을 것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은 재위 3년인 156년 길을 열었다. 문헌상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길이다. 1860년의 역사를 간직한 그 길은 지금도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잇고 있다. 하늘재다.

미륵 품에서 관음세계 향한 여정
나그네와 말들의 쉼터인 역원의
관리를 맡았던 미륵 세계사에는
인공석굴에 미륵불 모셔져 있어
망국의 한 담은 마의태자가 조성

미륵리 나서 관음리로 길 잡으면
하늘과 맞닿았다는 하늘재 만나
문헌상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길
뛰어난 풍광보다 역사 깊은 고개

하늘재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렸다. 계립령(鷄立嶺)은 신라를 뜻하는 계림(鷄林)과 연관 있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다면 계립령은 ‘신라 고개’다. 대원령이 하늘재로 전음 된 데 대한 견해도 다양하다. 일리 있는 설 하나를 나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대원(大院)은 큰 대(大)와 담(울타리) 원(院)으로 이뤄져 있다. 직역하면 큰 담, 큰 울타리. ‘한’은 명사와 함께 쓰일 때 크다는 의미도 갖는다. 서울의 한강이 ‘큰 강’으로 읽히는 것과 같다. 하여 훗날 대원령은 큰 울타리 개념의 ‘한울재’로 불렸는데 세월이 지나며 하늘재로 굳어졌을 듯싶다. 지금의 ‘하늘재’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 고개를 넘는 순간 마주하는 하늘이 너무도 멋지기에 ‘하늘과 맞닿는 재’ 의미의 하늘재로 알려져 있다.

당초 아달라왕은 북진을 위해 이 길을 뚫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함은 물론 고구려와 백제 땅을 품에 안으려는 의도였다. 삼국시대의 온달과 연개소문에 이어 후삼국 시대의 왕건과 견훤도 남북의 요충지 하늘재를 차지하려 피를 흘렸다. 홍건족 침입 당시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피난했던 고려의 공민왕도 이 고개를 넘어 안동으로 향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길을 떠난 고구려의 아도화상도 이 산길을 걸어 김천을 거쳐 구미로 들어 가 도리사를 지었다고 하니 불교전래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던 고개다. 문경에서 빚어진 도자기도 이 길을 통해 충주를 거쳐 배를 통해 한강 유역으로 운반됐으니 남북 무역의 교두보였던 하늘재이기도 하다.

▲ 미륵세계사 전경. 석조여래입상은 해체 복원 불사 중이다. 2018년 3월 회향할 예정이다.

해발 525m의 하늘재 정상을 기점으로 문경서 오르는 하늘재 아랫마을은 관음리(觀音里)고, 충주서 오르는 하늘재 아랫 마을은 ‘미륵리(彌勒里)’다. 석가모니 부처님 입적 후 도솔천(兜率天)에 머물다가 56억 7천만년 후 중생을 구하려 이 땅에 오신다는 미륵, 그 미륵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해탈시켜 주신다는 관음보살이 하늘재를 두고 마주한 셈이다.

오늘 그 고개를 넘으려 한다. 미륵 품에서 걸음 해 관음세계로 들어가 볼 참이다. 이 여정서 처음으로 마주해야 할 절은 미륵세계사. 미륵 마을에 조성된 미륵부처님은 어떤 상호일까? 아! 안타깝게 미륵부처님은 창살 속에 계시다. 해체보수 불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2014년 7월에 시작된 이 불사는 2018년 3월에 마칠 예정이란다.

미륵부처님은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석굴 형식의 불전 중앙에 모셔져 있다. 석굴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조성해 작은 불상들도 부조해 놓았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석굴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경주 토함산 석굴암이 떠오른다. 미륵불 앞에 서 있는 5층석탑(보물 95호)은 유난히 당당해 보인다. 절에서 몇 걸음 옮기니 큰 터가 나온다. 목조건축물의 기둥을 받쳤던 석조들이 산적해 있다. 절터일까? 아니다. 긴 걸음 했을 나그네들이 쉴 방과 말(馬)들이 쉬는 공간, 즉 역원(驛院)이 있었던 자리다.

▲ 역원이 들어섰던 미륵대원지. 역원은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절이 관리했다.

1977년부터 1991년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5차례에 걸쳐 이 일대를 발굴 조사했다.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사(彌勒堂寺)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역원 관리를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사찰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미륵세계사가 역원을 관리했다고 보면 된다. 역원이 섰던 터는 2011년 충주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로 명명됐다.

하늘재를 향해 난 길은 고즈넉했다. 경사는 가파르지 않고 완만해 산책하는 기분이다. 누군가 벌써 관음리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로 내려오고 있다. 허름한 옷 차림의 나그네. 굳게 다문 입술. 불굴의 의지와 깊은 슬픔을 동시에 자아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金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자 마의(麻衣) 하나 걸치고 금강산으로 들어 가 생을 마쳤다는 ‘마의태자’다. 미륵세계사에 안치된 미륵불은 그가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두 가지 설이 있다.

금강산으로 향할 당시 김일은 동생 덕주 공주와 함께 있었다. 덕주 공주는 월악산으로 들어가 마애불을 조성했는데 지금의 덕주사 마애여래불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태자 김일은 지금의 미륵세계사에 미륵불을 조성했는데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누이가 조성한 여래불과 미륵불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불법에 의지해 망국의 한을 달래려 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읽힌다.

▲ 미륵대원지를 지나면 홀로 서 있는 3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김일은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 사실이라면 관음리에 머물 때 계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늘재를 넘자마자 지세를 살펴 본 그는 지금의 미륵리에 미륵석불을 봉안했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설이 혼용돼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김일 태자가 왜 이 길을 택했느냐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할 때 태자 김일은 “어떻게 천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라며 분개했다. 망국의 한을 떨쳐 버릴 수 없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생을 마치려 했다면 굳이 내륙의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명산  유람 차 떠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주서 금강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즉 지금의 동해안 7번 국도를 해안선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가면 그만 아닌가?

▲ 미륵세계사 윗 쪽에서는 대광사 불사가 한창이다.

산과 강, 마을, 길에 새겨진 이름은 현재에 자리한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전설과 역사를 넘나들도록 한다. 태자 김일과 연관된 명소를 추적해 보면 그는 경주를 떠나 문경과 충주를 거쳐 제천, 원주, 용문, 홍천을 지나 인제에 이르렀다. 강원도 인제 ‘마의태자권역’에 눈을 돌려 보자.

인제는 김부대왕(金富大王)을 수호신처럼 여긴다. 그 김부는 누구일까?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金傅)다. 태자 김일(金鎰) 역시 김부(金富)로 불린다. 김일의 일(鎰)은 넘쳐난다는 의미의 일(溢)로도 바꿔 쓰인다. 넘침과 부유가 일맥상통하니 일(溢)과 함께 부(富)도 썼던 것이다. 신라의 독특한 향찰식 표기에 따른 것이라 보면 된다. 따라서 김부대왕(金富大王)은 태자 김일이다. 군사 훈련장이 있었던 김부리(金富里)에는 김일 태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김부대왕각이 있다. 이 마을에는 김일 태자가 경순왕의 옥새를 가져와 바위에 숨겼다는 옥새바위도 있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 즉 군사가 주둔했던 갑둔리(甲屯里)도 그대로 있다. 다물 삼거리도 있다. 다물은 ‘다 무르다’ 즉 회복을 뜻한다. 이러한 행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항려(抗麗)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할 때 김일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하늘에 달려 있다 하지만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 힘이 다한 후 그만 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인제에 닿기 전까지 그는 신라 재건을 함께 할 충신과 의사를 모았던 것이다. 한계령 서쪽에 펼쳐져 있는 한계산성! 향토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산성에서 김일 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꿨던 군사들과 함께 고려에 대항하며 전투를 벌였다.

▲ 미륵리서 관음리로 건너는 하늘재 길이 고즈넉하다.

신라 재건은 실패했다. 김일 태자는 인제에서 전사했을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금강산으로 들어갔을까?

다소 비약적으로 들리겠지만 일각에서는 김일 태자가 한계산성 전투서 패한 후 만주땅으로 올라 가 여진족을 통합 했다는 설마저 제기하고 있다. 여진족은 나라를 세우며 금(金)이라 했다. 김씨 성을 가진 우두머리가 건국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훗날 청나라를 세운다. 청나라 왕가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신라를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만으로 고대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서의 한 줄 기록에 태자 김일의 모든 행적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 무엇도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입각해 김일을 비운의 태자로 묘사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마의 태자’만을 우리가 안을 이유는 없다. ‘마의 태자’에 앞서 ‘태자 김일’을 조명하는 게 더 온당해 보인다.

▲ 하늘재 전망대에 오르면 포암산과 문경을 감상할 수 있다.

김일은 저 아랫 절에서 상당기간 머물며 군사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으로 미륵불 앞에 나아가 신라재건의 원을 세웠을 것이다. 포부도 당당하게 북으로 향하는 태자 김일이 보인다. 곧 한강을 건너 용문에 이를 터. 미륵마애불과 5층석탑이 그의 길을 지켜 보고 있다. 석등은 그의 앞길을 밝히고 있다.

숲길 끝에 하늘이 펼쳐졌다. 한 여름에서 초가을로 들어서는 서늘한 바람이 나그네를 맞는다. 고개를 넘어 관음리로 내려가려 했지만 영 내키지 않는다. 관음리로 향한 하늘재 길이 포장도로인데다 인도조차 제대로 내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재가 반 토막 난 기분이다. 저 아래에 관음원과 약사암을 비롯한 많은 절들이 있는데 못내 아쉽다. 아스팔트 걷어 내고 인도가 확보되면 그 때 한 번 넘어 볼 일이다.

하여 전망대로 발길을 옮겼다. ‘하늘재’ 표지석이 서 있다. 이 고개가 보여주는 풍광보다 이 고개에 담긴 역사에 무게를 둔다면 지금이라도 옛 이름인 ‘한울재’로 고쳐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전망대에서는 포암산과 문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오곡백과 익어가는 계절에 하늘재 오르는 나그네들은 청명한 하늘을 안고 돌아갈 수 있겠다. 눈 내리는 날에도 능히 오를 수 있는 하늘재다. 꼭 한 번 걸어 보시라!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길라잡이

들머리는 충주 미륵리 미륵대원지 주차장. 100m 거리에 미륵세계사와 미륵대원지가 있다. 하늘재 표지석을 기점으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3층석탑과 불두, 그리고 대광사를 참배할 수 있다. 하늘재 표지석으로 다시 돌아 와 왼쪽으로 난 작은 숲길로 들어서서 곧장 올라가면 하늘재에 닿는다. 하늘재를 넘으면 문경 관음리다. 아쉽게도 문경으로 난 길은 포장된 찻길이고 인도가 없어 걷기에 매우 불편하다. 하늘재 전망대에 오르면 포암산과 문경의 관음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미륵세계사서 하늘재까지의 2.5Km 직선코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차편이 마땅치 않은 만큼 하늘재를 넘어 관음리로 가기 보다는 미륵세계사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택하는 게 좋다.


이것만은 꼭!

 
석조귀부: 미륵세계사 도량에 있는 귀부로써 길이는 605㎝이고 높이는 180㎝다. 국내 석조귀부로는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좌측 어깨 부분에 거북 두 마리가 올라가는 형태가 양각돼 있다. 석조귀부에 맞는 비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당간지주: 미륵세계사 도량에 있다. 지주의 아랫부분이 없어 전체 길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윗부분 바깥 면에 6엽 연화문이 양각됐다. 학계에 따르면 당간지주에 연화문을 새겨 넣은 것은 불과 3점 뿐이라고 한다.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고창 흥덕 당간지주, 그리고 충주 미륵세계사 당간지주다.

 

 

 

 
불두: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두로써 높이만도 138㎝. 이목구비가 확실하며 코와 잎 사이의 주름선을 사실적으로 음각했다. 상호 자체가 독특한데 학계는 미완성 석불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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