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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관악산 공원- 삼막사- 연주암- 연주대

지고 온 고뇌, 암자 절벽 밑으로 던지다

▲ 신라의 의상대사가 세운 의상대는 조선시대로 접어들며 연주대로 불렸다. 서울과 경기 일대에 펼쳐진 산하를 품은 관악산에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시를 몰라도 시인이 되고야 마는 계절. 전재승 시인의 노래처럼 ‘낡은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잉크 빛 보다 진하게 사랑의 오색 밀어들을 수놓으며 밤마다 너를 위하여 한 잔의 따듯한 커피 같은 시를 밤새도록 쓰고 싶’은 가을이다. 눈앞에 놓인 원고지 칸을 안 메우면 또 어떤가! 길 떠나는 순간 시인이 되는 것을!

원효-의상-윤필 세 성인
정진 해 ‘삼성산 삼막사’

의상 대사 올라 ‘의상대’
양녕-효령 올라 ‘연주대’
하늘-바다 닿은 절경 연출

붙잡지 못한 인연 있거든
바람 속에 흘려 보내시게

성인(聖人) 세 사람이 머문다는 삼성산(三聖山)을 오른다. 누군가는 환인, 환웅, 단군이 이 산에 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서에 등장하는 태백산에 버금가는 큰 산이다. 또 누군가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상주한다’고 했다. 삼성산이 곧 극락정토라는 말이다. 전자는 확인할 문헌이 없고, 후자는 다소 추상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원효와 해골’ 전설을 꺼내 보자. 한 밤중 마신 감로가 아침에 확인 해 보니 해골 안에서 썩은 물이었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모든 건 마음이 만든다’는 진리를 직시한 원효는 이후(661년) 선악미추의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무애의 삶을 살았다. 그의 흔적, 경기도에 많다.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는 북한산 원효봉과 원효암이 대표적이다. 유독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자리를 찾았던 원효 대사.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 있는 삼성산도 대사의 시야에 들어왔을 터다.

▲ 삼막사 도량에도 가을을 안은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677년 원효 대사는 이 산에 들어 와 막을 치고 정진에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당나라 화엄유학을 마치고 귀국(671)한 의상과 거사이면서도 대사로 불렸던 윤필 대사가 동행했다. 두 대사도 각각 막을 치고는 삼매에 들었다.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이 산에 머물렀다 해서 삼성산(三聖山)이다. 세 대사가 움막을 치고 정진한 도량은 신라 말의 도선 국사가 관음보살을 봉안하며 관악사로 불렸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중건하며 ‘삼막사(三幕寺)’라 칭했다.

그로부터 671년 뒤인 1348년 이 도량에 또 다시 두 명의 거물이 들어선다. 고려 말의 고승 지공과 나옹 선사다. 두 선사의 덕화로 삼성산에는 선풍(禪風)이 크게 일었다. 34년 후인 1394년 무학대사가 이 산에 들어 와 국운융성을 기원했고, 4년 뒤인 1398년 왕명에 의해 삼막사가 중건됐다. 이후 삼막사는 무학대사가 세운 동쪽 불암사, 서쪽 진관사, 북쪽 승가사와 함께 비보사찰 역할까지 담당한다. 훗날, 서산 휴정과 사명 유정도 이 산을 찾았다. 당대의 불교를 대표하는 거성들이 머물렀으니 불심 깃든 산이다.

삼막사가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으니 암자격일 거라는 예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의외로 큰 절이었다. 절은 세 성인의 전설 외에도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청명한 날 황해도 보인다는 망해루에 앉아 그 이야기 담아 보시라.

삼막사 스님이었던 김윤후가 몽고 침입 시 용인 처인성 전투(1232년)에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를 처치한 공로를 기념해 세웠다는 살례탑. 남근석과 여근석을 지나 칠보전에 봉안된 마애불 코를 만지면 자식을 낳는다는 설 등이 전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이제 관악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연주대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학바위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으나 이미 8Km에 육박하는 산길을 걸은 사람에게는 된비알로 다가온다. 누워도 될 법한 바위 하나 만나 숨을 고른다. 한양서 그리 멀지 않은 산이니 조선 선비들도 이 산을 찾았겠지? 순간, 웃음이 절로 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정조의 스승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이 떠올라서다.

그의 나이 67세에 관악산 연주대에 오른 채제공은 ‘유관악산기’를 남겼는데 문집 ‘번암집(樊巖集)’에 실려 있다. 지난 7월에 출간된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돌베게)에 담긴 ‘유관악산기’를 엿보자.

‘마침내 절 뒤쪽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갔다. 어떤 때는 끊어진 길과 벼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여서 몸을 돌려 절벽에 바짝 붙이고 손으로 번갈아 가며 나무뿌리를 잡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겼는데, 두렵고 어지러워 감히 곁눈질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은 67세 어른도 노인정에서는 ‘청년’ 소리 듣는다지만 조선 당시의 67세는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다. 그 할아버지 ‘두렵고 어지러워 감히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몸을 절벽에 바짝 붙여가며 암벽을 타고 있다. 그 다음 대목이 압권이다.

‘어떤 때는 큰 바위가 길 한가운데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아주 뾰족하지 않으면서 움푹 파인 쪽을 골라 엉덩이를 거기에다 붙이고, 두 손으로는 그 주위를 붙잡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이 같은 경우를 여러 번씩 만난 후에야 비로소 연주대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지가 찢어져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니! 영의정까지 지낸 선비의 품격은 온데 간데 없다.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다. 산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똑 같은 길을 내 준다.

▲ 삼막사는 의외로 큰 절이다. 육관음전 전경.

삼성산에 머물던 의상대사는 마주하고 있는 관악산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고는 어느 날 더 깊은 산으로 들어섰다. 분명, 학바위능선이나 팔봉능선을 이용해 산을 넘었을 게다. 산 정상 아래에 펼쳐진 천혜의 절벽을 발견 하고는 ‘여기다!’라며 무릎을 ‘탁’ 쳤겠지. 왜 아니겠는가? 삼성산과 관악산 줄기를 다 안고도 한강과 서해까지 품은 터가 아닌가.

산 절벽에 의상대를 세우고는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지금도 관악사지는 남아 있다)라 했다. 연주암의 전신인 관악사 창건 연대가 677년이라는 기록이 의상 대사의 흔적을 방증하고 있다. 세상은 무상한 것. 관악사도 세월의 풍파에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성성하게 남아 있는 건 의상대 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손길이 닿았다. 무학대사의 권유에 귀 기울인 이성계는 의상대에 석축을 쌓고 대를 구축하고는 암자를 지었다. 지금의 연주대 모습은 그 때 구현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를 셋째 아들 충녕(세종)에게 넘기자 맏이와 둘째아들이었던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이 산을 올랐다. 채제공의 ‘유관악산기’ 한 토막이 연주대와 연주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옛날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하여 관악산에 와서 머무를 때, 간혹 이곳에 올라 와 대궐을 바라보곤 했는데…… 대는 연주(戀主)라 하고…’ 

▲ 삼성산에서 바라본 관악산 줄기. 연주암은 사진 왼쪽 기상 기상관측소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두 대군은 관악사에서는 왕궁이 내려 보인다 해서 절을 옮겼다. 왕위를 잇지 못한 아픔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교차되는 궁을 매일 보기가 버거웠을 게다. 이후로 의상대는 연주대로 바뀌었고 새 암자는 연주암으로 불렸다.

연주대다. 천길 절벽에 간신히 걸터 앉은 암자이나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서 있다. 연주대에 오른 사람은 안다. 채제공이 왜 ‘하늘을 보면 바다 같고 바다를 보면 하늘 같아 보일 뿐이니 그 누가 하늘과 바다를 분간할 수 없다’고 했는지 말이다.

▲ 고즈넉한 연주암 도량에 세워진 삼층석탑(고려 말)이 초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연주대에 올랐으니 지인에게 편지 한 통 날려야겠다. 허나, 그건 하산에서 할 일. 번뇌 하나 툭 던지자. 이수인 시인이 그리 했듯이 말이다.

‘밤 깊은 연주암에도 가을은 찾아와…… 스스로 보내지 못한 낙엽은/ 바람이 실어가나 남겨진 빈 가지는/ 겨우내 울음 우는구나… 나그네여/ 붙잡지 못한 인연 있거든/ 저 바람 속에 흘려 보내시게나… 나그네여/ 날이 밝아 온다 해도 쉬엄쉬엄 가시게/ 가져온 고뇌는 암자 절벽 밑으로 던지시고/ 아득한 세상 한 자락 붙잡고 허허 웃으시오/ 사는 게 별거냐고’ (시 ‘연주암에서’ 인용)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서울대 옆 관악산공원 입구. 관악산 호수공원 방향으로 600여미터 걷다 보면 ‘삼성산 성지’로 가는 이정표(왼쪽)와 함께 등산로(오른쪽)가 보인다. 돌산과 장군봉, 국기봉 분기점을 지나면 삼막사 분기점(2시간 30분)에 이른다. 삼막사 참배 후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 와 무너미 고개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따라 400m 이동 하면 왼쪽에 등산로(포장도로 따라 계속 직진하면 삼성산 정상)가 보인다. 300m 지점서 헬리포트를 보았다면 길은 제대로 든 것이다. 이 지점서 관악산 기상관측소와 KBS 송신소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길을 잡아야만 한다. 잠시 후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보인다. 600m 이동하면 무너미고개 분기점. 학바위 능선을 따라 오르면 연주대 분기점(2시간 40분)에 닿는다. 삼성산 헬리포트 지점서 관악산 KBS 송신소 분기점까지는 계속 직진이다. 송신소 분기점서 잠시 내리막길을 걷다가 데크로를 따라 왼쪽으로 틀면 연주암 분기점이다. 연주암서 과천향교까지의 하산길은 완만한 편이어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총 12Km. 등산시간은 약 7시간.


이것만은 꼭!

 

삼막사 3층석탑: 삼막사에 주석했던 김윤후(金允侯) 스님은 몽고 침략 당시 승병(僧兵)이 되어 용인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몽고군 원수(元帥) 살리타이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탑이 삼막사 3층석탑이라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12호.

 

 

 

 

 

연주암 효령각: 태종이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효령대군은 양녕대군과 함께 한동안 연주암에 머물렀다. 유신(儒臣)들의 반대에도 회암사와 원각사를 일으키는데 큰 힘을 쓴 효령대군은 불교중흥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졌으며 현재 경기도 지방문화재 81호로 지정돼 있다.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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