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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운제산 오어사-원효암-자장암

오어사, 산과 물 사이에 가부좌한 채 ‘가을 삼매’에 들다

▲ 가을 빛 닿은 오어사 풍광은 산사 풍광 중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힌다.

청명한 11월의 가을 하늘이다. 오어지 감싸 안은 산도 단풍 들어 가을정취를 자아낸다. 늦가을은 길을 걷는 이로 하여금 쓸쓸함과 숙연함이 섞인 묘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어서일까?

원효·의상·혜공·자장 네 스님
한 공간에서 수행했던 운제산

신출귀몰 혜공 원융무애 원효
똥 누어 놓고 촌철살인 대결

산봉우리 아래 걸터 앉은 자장암
절이 내준 풍경만 봐도 무념세계

다리 하나 건너야 한다. 가만 보니 원효교다. 원효대사가 이 산에 들어와 초암 짓고 정진한 때가 있었다. 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원효암이 그 역사를 방증하고 있다. 조금 더 가니 또 하나의 다리가 보인다. ‘원효암 2’일까? 아니다. ‘혜공교’다.

▲ 산 봉우리에 자장암이 걸터 앉아 있다. 혜공암도 저 봉우리 어디쯤 서 있었다.

이차돈이 순교(527)한 지 17년만인 544년 진흥왕은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짓는다. 그러자 태청 초년(547~549)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이운해 오고, 진나라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이 불경(565년)을 신라 땅에 가져온다. 대흥륜사 불사를 마친 진흥왕은 8년 후인 553년 황룡사를 짓기 시작 해 16년여 만인 569년 완성한다. 이즈음부터 신라 땅에는 ‘절과 절들은 별처럼’ 늘어서고, ‘탑과 탑이 기러기떼’처럼 세워지기 시작한다. 대흥륜사 불사 100년, 황룡사 불사 90년 만인 643년 황룡사에는 거대한 탑 ‘구층목탑’이 세워졌다.

400년 신라불교의 등불이었던 그 대흥륜사의 금당에 훗날 10성인이 안치된다. 동쪽에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는 소상은 아도, 염촉(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이고, 서쪽 벽에 앉아 동쪽 벽을 응시하고 있는 소상은 표훈, 사파, 원효, 자장, 그리고 혜공이었다.

▲ 자장암에 하루의 첫 햇살이 배어가고 있다.

혜공은 신라 귀족 천진공(天眞公) 집에서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가 전 이름은 우조(憂助). 항생제가 없던 그 시절 심한 종기를 앓던 천진공이 급기야 죽음에 직면했다. 그의 인격 꽤 괜찮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병문안 가려 줄을 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7살의 우조가 어머니에게 말한다.

“제가 공(公)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당치 않는 얘기로 들렸겠지만 어린 아이가 어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신기해 어미는 공에게 그 일을 전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터. 공이 사람을 시켜 우조를 부른다. 우조는 침상 아래 말 없이 앉았다.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러자 천진공의 종기가 터지더니 고름이 쏟아졌다. 천진공은 목숨을 건졌다. 허나 천진공을 비롯한 그 누구도 우연의 일치라 여겼을 뿐 우조가 병을 치료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때 우조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니, 내가 공의 병을 고친 걸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 일주문 직전에 마주한 혜공교.

매 보는 눈이 탁월했던 천진공을 위해 우조는 똘똘해 보이는 매 한 마리를 길렀다. 천진공이 보고는 마음에 들어 했다. ‘잘 길러서 갖다 달라’했을 터. 어느 날 관직을 얻은 동생이 좋은 매를 청해오기에 천진공은 매 한 마리를 점지해 줬고 동생은 받아 돌아갔다.

그 때 생각났다. 우조의 매! 동이 트는 대로 아침 일찍 사람을 시켜 우조에게 그 매를 가져오라 명하려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천진공은 하인을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우조는 동틀 무렵 매 한 마리 안고는 천진공 대문을 두드렸다.

 

천진공은 그제야 알아 챘다. 자신의 고름병을 고쳐 새 삶을 선사해 준 사람이 우조였다는 사실을! 우조에게 절을 올렸다.

“성인이 저희 집에 오신 줄 몰랐습니다. 무례한 언행으로 성인을 욕되게 했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신령스런 일을 보인 우조는 그 즉시 출가하고는 ‘혜공(惠空)’이라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아침 빛 받으며 푸른 하늘 담기니 오어지 물빛은 점점 녹색으로 변해가고, 해 높이 떠오를수록 산은 제가 가졌던 붉은 빛을 더욱 더 진하게 발한다. 산과 물 사이에 가부좌한 오어사는 가을 정취 안은 채 침묵에 들었다. 오어사의 ‘가을 삼매’라 하겠다.

▲ 오어사 대웅전 전경.

원효암 가는 길에 자꾸 등 뒤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해발 600m의 산봉우리 아래 간신히 걸터앉은 자장암이 신기해서다. 북쪽 저 산봉우리 어디쯤, 대략 지금의 자장암 부근 언저리에 혜공암도 있었다. 자장암과 마주한 남쪽에 원효암이 있고 서쪽 봉우리에는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었다.

원효와 의상이 한 산에서 수행했다는 암자들은 꽤 많다. 그러나 자장 스님이 등장해  원효 의상과 함께 한 개의 산 한 공간에서 수행정진했다고 전해지는 암자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조사가 운제산에서 정진했다는 이야기는 산 이름에서 연유한다.

남쪽의 원효암에서 북쪽의 자장, 혜공암으로 가려면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만 하는데 경사도가 만만치 않아 녹록치 않다. 지금의 길이 그 때도 뚫려 있었다면 그나마 편한 길이 오어사로 내려 왔다가 다시 자장암으로 오르는 게 낫지 싶다. 조사 네 명 중 누군가 원효암 봉우리와 자장암· 혜공암 봉우리를 잇는 다리를 놓았다. 지금 저 아래 오어사 앞에 놓인 현수교가 아니다. 구름 사다리를 놓았다. 바로 구름 운(운雲), 다리 제(梯) ‘운제’다. 하여, 산 이름이 운제산(雲梯山)이다.

 
법담 나누려 산행에 나선 조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화한 산 아래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오어지가 있으니 물안개 꽤 많이 피어오르는데 한 여름 구름마저 내려오면 두 안개 만나 남북의 두 봉우리를 잇기도 했을 터. ‘조사분들 쉬이 왕래하시라 하늘이 내려 보낸 사다리’라 말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네 명의 조사를 숭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리라.

운제산에 네 조사가 함께 들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638년 이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자장율사는 63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645년 전후 귀국했다. 스님의 절 불사는 귀국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의상대사는 661년 당나라로 유학 간 후 670년 귀국한다. 670년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이른다. 따라서 네 성인이 이 산에 든 건 645년에서 661년 즈음으로 추산할 수 있겠다.

▲ 원효암으로 가는 길에도 가을이 밀려들고 있다.

원효암은 고즈넉했다. 관음전 앞 뙈기밭에 아직 푸른 배추가 남아 있다. 절 김장은 좀 더 있어야 하는가 보다. 산신각으로 난 국화길이 산사의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원효대사는 여기서 정진했다. 어느 길을 따라 자장암으로 올랐을까? 암자 옆 붉은 단풍나무를 지나 산길을 탔다.

한 때 원효보다 혜공이 내외전, 선교 전반에 걸쳐 앞선 듯싶다. ‘삼국유사’속 이야기 한 토막 들어보자.

‘원효가 여러 경전의 주해를 지으면서 매번 스님(혜공)을 찾아 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다’

두 조사는 서로 법담이 담긴 농도 자주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두 조사는 물고기와 새우를 먹고는 돌 위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원효의 대변을 가리켜 그 유명한 한 마디를 던진다.

“여시오어(汝屎吾魚)!”

한자 풀어 보면 둘로 해석된다. “네 똥은 내 물고기다!” “네 건 똥이고 내 건 물고기다!” 어느 해석을 선택하든 독자의 몫이다. 이후 이 이야기는 살이 보태져 좀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전개돼 사적에 담긴다. 그 한 이야기를 전하면 이렇다.

‘원효와 혜공 스님이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똥으로 배설된 물고기를 살리는 시합을 벌였다. 두 조사 모두 물고기로 살려냈으나 한 마리는 살지 못해 죽었고, 다른 한 마리만 살아서 힘차게 헤엄쳐 갔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며 “내(吾) 고기(魚)”라고 했다는 설화다. 중요한 건 원래의 절 이름 항사사(恒沙寺)가 그 사건 이후 ‘내 물고기’의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 운제산 남쪽에 자리한 원효암이 고즈넉하다.

혜공은 정말이지 신출귀몰 했던 조사였다. ‘혜공이 우물에 들어가 몇 개월 동안 머무르다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고 항상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다.’ ‘신라 땅에 최초로 밀교를 전파한 명랑법사가 금강사(金剛寺) 창건 법회를 할 때 당대의 유명한 스님들이 운집했는데 혜공 조사가 보이지 않자 향을 사르며 경건하게 기도하자 어느 순간 혜공 조사가 나타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옷과 발에 진흙 한 덩이조차 묻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혜공은 생전에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공성(空性)과 불이(不二)와 반야의 진면목을 담은 ‘조론(肇論)’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내가 예전에 지은 것이다.”

‘조론’은 중국 승조(僧肇)가 지었다. 승조는 384년에서 414년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승조법사 사후 약 200년 만에 혜공으로 몸을 갈아 입고 환생했던 것일까? 

자장암으로 가던 중 산 중턱서 내려다 본 오어사 풍광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그냥 바위턱에 앉아 절이 내 준 풍경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무런 잡념이 들지 않는다. 저녁 노을 설 때까지 그냥 이렇게 머물렀으면 좋겠다! 자장암도 한 눈에 들어온다. 암자 들어 선 봉우리 위로 무엇인가 하늘거린다. 혜공조사인가?

‘삼국유사’는 혜공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혜공은 공중에 떠올라 입적을 고했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삼국유사’(고려대학교출판부).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운제산(오어사) 둘레길 주차장. 600m오르면 오어사 저수지로 불리는 ‘오어지’ 둑에 이른다. 저수지와 운제산 줄기가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원효교와 혜공교를 지나 출렁다리에 이른다. 바로 오어사다. 자장암까지는 300m. 다소 경사가 있어 30분쯤 걸린다. 오어사 해수관음상 뒤편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 600m 오르면 원효암이다. 가파르지 않아 오르는 데 40분이면 충분하다.


이것만은 꼭!

 
오어사 대웅전: 오어사 경내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고건축물이다. 1741년(영조 17)에 중수한 것이 원형이다. 1985년에 경북 문화재자료 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10월22일 경북 유형문화재 452호로 승격 됐다. 대웅전 옆 오어사 유물전시관에는 원효 스님이 사용했다는 삿갓이 보관돼 있다.

 

 

 

 
오어사 동종: 동종 한쪽 당좌 위 위패 모양의 명문곽 안에 ‘옴마니파드메훔’으로 보이는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 새겨져 있다. 학계에서는 이 종으로 1216년에 이미 범자문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1368호 / 2016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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