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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시 카슈미르로

만세라에서 종교적 관용 특별선언 담은 아쇼카 마애법칙 만나다

▲ 라왈핀디에서 무자파라바드로 가는 도중 머리로 넘어가는 갈림길에서 바라본 카슈미르 쪽 원경. 까마득히 바라보이는 저 산 너머가 인도 령 카슈미르이다.

당초 스와트 지역을 답사한 후의 계획은 밍고라에서 북쪽의 샹글라 고래(해발 2134m)를 넘어 베삼이라는 곳에서 아쇼카 왕 암각법칙이 있는 하자라 지역의 한 도시인 만세라로 가,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무자파라바드로 가는 것이었다. 무자파라바드는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Azad Jammu & Kashmir)의 주도(州都)로, 1948년 유엔에 의해 정전선이 그어지기 전까지 피르판잘 산맥을 넘어 우리-바라물라-스리나가르(총 170㎞)로 가는 길목이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로 입경은
외국인이라 불허, 발길 돌려서
카슈미르 행 출발점 머리로 이동
만세라로 가서 아쇼카 흔적 발견

카라코람 하이웨이 길가에 위치
샤바즈가리 마애 각문에 비해서
보호 잘되고 안내판 상태도 양호
아쇼카왕 각문은 생명 존중 강조

현장 법사 또한 스와트(웃디야나)-훈드(우다칸드)-탁실라-하자라(우라샤)에서 피르판잘 산맥을 넘어 카슈미르(바라물라-스리나가르)로 들어갔고, 혜초 스님은 반대로 카슈미르에서 간다라(훈드 혹은 푸시칼라바티)-페샤와르-스와트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았다. 해서 카슈미르의 서쪽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현장과 오공이 말한 카슈미르 서문(西門) 밖의 풍경을 느끼기 위해서는 최소한 만세라를 거쳐 무자파라바드까지 가 보아야 하였다. 그러나 샹글라 고개를 넘어 베삼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라 다시 라왈핀디로 가 거기서 무자파라바드로 가기로 하였다. 실제 일주일 후 만세라에서 간 베삼은 외국인의 출입과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을 뿐더러 시내 곳곳에 장갑차가 주둔하고 있는 등 긴장감이 역력하였다. 무자파라바드 역시 NOC가 필요한 지역이었지만 밍고라에 갈 때처럼 일단 부딪쳐보기로 하였다.

라왈핀디에서 무자파라바드 행 버스는 메트로 버스 10번 역인 파이자바드 인근의 스카이웨이 버스 스탠드에서 출발하였다. ‘하늘 길 버스’라니 이름부터 심상치 않았다. 140㎞, 네 시간의 장거리임에도 25인승 중형버스였다. 이 역시 로컬버스답게 승객이 다 차기를 기다렸다 출발하였다. 고속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한 시간 쯤 지나자 머리(Murree)라는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버스는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머리는 해발 2300여m 고원의 도시로 식민지 시절 영국 관리들의 피서를 위해 건설된 도시이다. 지금은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도 그러한 곳 중 하나이다. 굽이굽이 몇 굽이를 돌고 돌아 산 아래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고, 건너편 산등선의 집들이 점점이 보일 무렵 버스는 고갯마루인 아래 토파(Lower Topa)에 올라섰다.

고속도로는 여기까지였다. 길은 왼편의 머리로 가는 길과 계속하여 무자파라바드로 가는 길, 두 길로 갈라졌다. 무자파라바드 행 버스가 중형인 것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내려가는 길은 차 두 대가 겨우 교행 할 만한 꼬불꼬불한 소로였다. 버스는 미끈하게 솟은 자이안트 소나무 사이의 길을 쉼 없이 내려갔다. 군데군데 마을이 있었다. 거의 모든 집들이 벼랑에 걸쳐있었다. 모두가 전망대급이다. 하계를 내려다보는 것만 기준으로 삼는다면 여기가 지거천(地居天)이라 할 만하였다. 저 아래 인간계와는 까마득한 거리였다. 사람들은 이래서 높은 곳을 지향하는가? 저 멀리 하늘 끝에 푸르스름한 산들이 장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피르판잘의 중추가 되는 산맥일 것이다. 저 너머 인도령 카슈미르인 우리와 바라물라가 있다.

까마득히 계곡 밑으로 한 줄기 강이 나타났다. 젤름 강이다. 이 강은 스리나가르에서 무자파라바드를 돌아 판잡 평원의 젤름을 거쳐 물탄 부근에서 체납 강과 합류하여 인더스 강으로 흘러든다. 30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까마득히 보이던 강은 마침내 요동치는 물살과 흘러가는 소리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울긋불긋한 간판을 단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유원지인 모양이다. 이윽고 버스는 다리(코하라 브릿지)를 건넜고, 강 옆으로 난 비포장 길을 따라갔다. 무자파라바드까지 한 시간 정도 남겨놓고 검문소가 나타났다. 코하라(kohala) 폴리스 포스트이다. 외국인은 내려야 하였다. 우리뿐이었다. 급조한 듯한 간이사무실에 가니 영화배우같이 생긴 미남경찰이 우리의 인적을 기록한 후 NOC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여행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밍고라에 갈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서는 돌아갈 차편도 없으니 무자파라바드에 가면 바로 만세라로 떠나겠다고 통사정하였다. 이는 진심이었다. 무자파라바드에서 특별히 관광(?)할 것도 없었다. 다만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에 가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였다. 검문소 너머로는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버스 차장도 배낭을 내려달라고 요구한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민가도 없는 피르판잘의 산속, 젤름 강가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경찰에게 따져 물었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란다. 어떻게? 기다리란다. 매우 더웠고 배도 고팠다. 두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경찰이 머리로 가는 승합차를 잡아주었다. 무자파라바드 건설현장에 근무하는 중국인 차였다.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갔다. 젊은 중국인은 쉴 새 없이 중국말로 떠들었다. 고갯마루(토파)에 이르니, 자기들은 머리로 가니 여기서 내리란다.

내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한기가 느껴졌다. 한 여름에 한기라니. 우리도 무더운 라왈핀디에 갈 것 없이 머리로 가기로 했다. 머리는 카슈미르로 들어가는 출발점이고 무자파라바드의 턱밑인 코하라 검문소까지 갔으니, 이것으로 아자드(자유) 카슈미르 여행을 대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머리는 라왈핀디에서 가장 가까운, 가장 유명한 휴양지이다. 여기서 며칠 쉬다가 만세라로 가기로 하였다.

▲ 만세라의 아쇼카왕 암각법칙. 암각은 모두 네 개로, 만세라 외곽도로 위와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1번 사진은 위의 암각, 2번 사진은 아래 암각. 3번 사진은 아쇼카왕 암각법칙의 안내문. 현지주민들이 훼손하여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던 샤바즈가리의 암각법칙 안내문(제19회)과 대조를 이룬다.

앞서 잠시 이야기하였듯이 머리는 1876년 심라(Simla)로 옮겨가기 전까지 판잡 주의 여름 주도였고, 이는 독립 이후에도 상당기간 (이슬라마바드가 새 수도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머리에는 북쪽 아보타바드로 이어지는 길목마다에 갈리(Gali)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찬그라 갈리, 둥가 갈리, 나티아 갈리. 그 중 가장 대중적 휴양지라는 나티아 갈리로 가기로 하였다. 실랑이 같은 흥정 끝에 200루피(2달러)에 택시로 개조한 릭샤를 타고 갔다. 상당히 먼 거리였고 곳곳에 산사태가 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호텔과 방갈로, 식당 등이 길가에 즐비하였지만, 도로변에서 뚝 떨어진 곳에 그럴 듯한 건물이 보여 찾아가보니, 호텔이란다. 많이 낡았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에 격조 있는 건물처럼 보였고, 방도 넓었다. 하루 2000루피에 3일을 계약하였다. 체크아웃 하는 날 입구문패를 보니 ‘가버너스 하우스 governor’s house’라고 쓰여 있었다. 파키스탄 가이드북에도 나오는 옛날 정부 관료들의 휴양소였다. 쉬면서 아유비라 국립공원의 짧은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찬그라 갈리에서 둥가 갈리에 이르는 4㎞가 각별하였다. 저 멀리 피르판잘 산맥을 보며 걷는 길이었다. 다시 카슈미르가 생각났다.

나티아 갈리에서 좀 떨어진 칼라바그라는 마을에 아보타바드로 나가는 승합차 주차장이 있었다. 1시간 내내 내리막길이었다. 다시 무덥고 혼잡한 하계로 내려왔다. 아보타바드에서 본 나티아 갈리 쪽 풍경은 한 시간 거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높고 거대한 산악이었다. 여기서 만세라까지는 24㎞, 이 길은 이슬라마바드에서 파미르를 넘어 중국의 카슈카르에 이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KKH)이다. 만세라에는 캄보자(카슈미르) 땅에 세운 아쇼카 왕의 대마애법칙이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18회 ‘샤바즈가리의 아쇼카 법칙’), 만세라는 기원전 3세기 이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탁실라에서 아보타바드를 거쳐 카슈미르(무자파라바드-우리-스리나가르)나 북부 발루치스탄 지역, 혹은 베삼을 거쳐 스와트 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아쇼카 왕의 마애법칙은 만세라 북쪽 카라코람 하이웨이 길 가에 있었다. 만세라 버스터미널까지 갈 것도 없이, 운전수나 승객들에게 물을 것도 없이 GPS가 하차지점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도로 위쪽에 두 곳의 보호각에 두 개와 한 개의 바위가 있었고, 길 건너 아래쪽에도 한 개의 큰 바위가 있었다. 거친 화강암에 새긴 것이라 글자(카로스티 문자)가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샤바즈가리의 마애각문보다 보호도 잘 돼 있었고, 말끔히 청소도 되어있었다. 입장료도 없었다. 그곳의 안내판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여기의 것은 깨끗하였다. 영어와 우르드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 마하라자(大王) 아쇼카는 BC. 274년 왕위를 물려받았다. 제국의 남서쪽 인접국인 칼링가 정복전쟁 동안의 미증유 살상과 불교에 대한 믿음이 그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마하라자 아쇼카는 이제 전쟁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는 인류의 복지에 특히 헌신하였고, 이러한 신조가 광대한 그의 제국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다르마(法)’라 일컬어진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는 이를 큰 바위나 석주에 토속어인 ‘카로스티’ 등의 문자로 새겨 남아시아 각지에 세웠다.

BC. 256∼257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같은 아쇼카 각문은 도덕적 법칙과 종교적 관용에 관한 특별한 선언이다. 각문에서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 대한 생명의 존엄을 강조하였고, 죽음·결혼·탄생 등의 의식을 행할 때 무지에서 비롯된 나쁜 관습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아쇼카왕은 각문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미신적인 의식은 모든 중생을 위해 확고하게 실행해야 할 자애로운 행위나 그 밖의 선행, 이를테면 부모에 대한 순종, 스승에 대한 공경, 노인에 대한 존경과 종복에 대한 친절, 사회적 악을 초래하는 축제금지, 우물을 파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의 복지사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각문에서는 진실로 백성들에게 불타에 의해 선언된 경건한 도덕율(다르마)에 관한 고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여행은 사실상 이것으로 끝났다. 이후로도 이어진 길을 따라 파미르의 쿤자랍 패스를 넘어 중국의 카슈가르(疏勒)로, 거기서 다시 토르갓 패스를 넘어 키르기스탄의 오쉬(大苑)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颯末建)로, 불교가 동점하면서 거쳐 왔을 실크로드의 고대도시들을 여행하지만, 이번 여행의 주요목적이었던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 여행은 여기까지이다. 아쉬운 생각에 오래도록 아쇼카왕의 암각법칙을 떠나지 못하였다.

▲ 아침 산책 길에 들린 나티아 갈리의 예배당. 이슬람의 이념이 지배하는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의 예배당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아마도 식민지시대의 유물일 것이다.

허기가 밀려왔다. 새벽에 나티아 갈리 호텔에서 빵조각 하나 먹은 이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답사여행 내내 마치 과업이라도 수행하듯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헤매고 다녔다. 이미 늦은 점심이었지만 근처에서 먹기로 하였다. 마침 아래 암각 옆 길가에 식당이 보였다. 상호도 ‘아쇼카’였다. 몇 군데 단체손님이 눈이 띄었다. 좀 시끄러웠다. 햄버그스테이크와 비슷한 ‘케밥’이라는 것을 주문하였다. 시골의 음식점에서는 길가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솥을 달궈 다진 양고기를 지져내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 자말가리에서 샤바즈가리로 가는 도중 처음 먹어보았는데, 우리 입맛에 맞았고, 이후로도 가장 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파키스탄 음식이었다.

어디선가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파키스탄, 아니 카슈미르 간다라 답사여행을 시작한 이래 처음 듣는 한국말이다. 뒤쪽 건너편 테이블에 두 명의 한국 사람과 두 명의 파키스탄 사람이 식사하고 있었다. 무자파라바드의 수력발전소 건설공사 현장에 근무하는데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곳까지 식사하러 왔단다. 파키스탄인은 경호원인 듯 기관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무자파라바드에서 이곳까지 대략 50㎞,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다시 카슈미르가 상기되었다. 그곳은 분쟁지역이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운 것이지 지리적으로는 결코 먼 곳이 아니었다. 배낭여행자 차림이 궁색하게 보였는지 그들은 나가면서 우리 밥값도 함께 계산하였다고 말한다. 물 값까지. 고맙기도 하였지만, 카슈미르에 대한 아쉬움에 식당 밖까지 나가 그들을 배웅하였다. 무자파라바드에서 온 이들로부터 밥까지 얻어먹었으니, 카슈미르에 갔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다시 생각하였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69호 / 2016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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