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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사들은 왜 이리 과격한가?-중

과격한 방식, 아상 부수는 가장 불교다운 방법

▲ ‘심연’ 고윤숙 화가

학인의 전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옳다고 믿고 있는 전제를 깨주는 선사들의 이 과격한 방법은 사실 불교의 근본에 충실한 것이다. 그들이 깨주려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전제란 바로 ‘아상(我相)’이기 때문이다. 아상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 아닌가! 그러나 그 말을 백번 옳다고 수긍해도 그것을 내려놓는 것은 극히 어렵다. 반대로 내려놓았다는 생각 뒤에까지 숨어서 어느새 세상일을 분별하게 한다. 모든 판단의 전제가 되어 매순간의 언행을 만들어낸다. 어느새 자신이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려 한다. 자기와 동일한 언행을 하면 반가워하고 다른 언행을 하면 밀쳐낸다.

이것이 이념이나 종교,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게 되면, 올바른 ‘대의’나 ‘신념’, 혹은 신실한 ‘믿음’ 같은 형식을 취하기에 더욱 쉽게 정당화되며, 어느새 ‘나’를 넘어 ‘남’에게, ‘우리’를 넘어 ‘그들’에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다른 관습이나 생활, 관념이나 생각을 가진 이들을 자신의 관념이나 믿음에 맞추어 동일화시키려 하게 된다. 그게 안되면 배제나 추방의 힘을 발동시키기도 하고 심하면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근대 이후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가 바로 그렇지 않았던가? 그들은 ‘선교’나 ‘교화’, 혹은 ‘문명화’라는 이름 아래 극단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자기 관념으로 남들을 동일화하려 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미개인’들이 사는 열대의 적도에서 느껴야 했던 거대한 ‘슬픔’(‘슬픈 열대’)은, 자기와 다른 생활이나 문화를 스스로에게 동일화시키거나 제거하지 않곤 못 배기는 자신의 ‘신’과 자신이 속한 ‘문명’에 대한 자각에서 온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으로 남을 ‘동일화’하려는 이런 태도를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 철학은 ‘동일자’라는 개념으로 비판하고, 이 동일자에 의해 억압되거나 배제된 자, 추방된 자들을 ‘타자’라고 명명한다. 가령 서양의 휴머니즘은 백인을 모델로 하여 ‘인간’ 아닌 것들을 노예화하거나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억압과 배제의 역사와 정확하게 짝을 이루는 역사를 갖는다. 동물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흑인은 물론 인간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인디언’이 ‘인간’의 짝이 되어 배제된 타자였다. 또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이성’이란 게 실은 광인을 비롯한 이런저런 ‘타자’들을 수용소에 가두며 탄생한 동일자에 불과하며, 19세기에 들어와선 정신병자로 만들어 ‘치료’라는 이름으로 동일자의 권력을 가동시켜왔음을 보여준 바 있다.

옳다고 믿는 모든 것 전부 깨져나갈 때
허무의 늪인 심연 속으로 뛰어 들게 돼
불법이란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저 깊은 심연 속에서 결국 살아나는 것

이념은 오히려 믿음 아닌 현실에서 시작하기에 종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완고하다. 가령 기본적인 생활수단도 제대로 갖지 못해 매일의 삶에 쫓기는 대다수의 민중들에 대한 안타까움,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 행하는 불의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은 사람들을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같은 이념으로 밀고 간다. 그러나 그렇게 얻게 된 이념은,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 옳은 길인지, 무엇이 현재의 세계를 포착하는 옳은 개념인지를 두고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다투고 대립하게 한다.

합리적인 ‘비판’이나 ‘토론’을 해야 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비판은 언제나 상대방 생각의 약점이나 이론의 빈틈을 노린다. ‘자기비판’을 말하기도 하지만, 진정 자기가 갖고 있는 전제나 관념을 비판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설득과 논박을 통한 ‘동일화’와 확장, 언제나 그것을 추구한다. 심지어 이해관계에도 크게 좌우되지 않기에 아주 작은 차이로도 갈라져 싸운다.

그래서 언제나 ‘연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이념을 가진 사람끼리도 연대하기 힘들다.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도 망한다”는 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과거’를 갖고 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시절엔, 70년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며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의 유령, 80년 광주에서 죽은 많은 시민들의 유령이 교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유령들에 ‘홀려’,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에 대한 공감, 불의와 억압을 행사하는 자에 대한 분노에 이끌려 나도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맑스주의에 매료되었다. 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직업적 혁명자 조직’을 꿈꾸며 지하운동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로 인해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억압 없는 평등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감옥생활도 충분히 견딜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갇혀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사회주의 동독이 붕괴했고 급기야 사회주의 소련마저 망해버렸다. 더욱 난감한 것은 탱크가 국회의사당에 포탄을 날리고 하는 사태에도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들은 그저 묵묵히 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붕괴한 그 자리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참상이 부정할 수도 없고 변명할 수도 없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때 감옥 안에서 느꼈던 당혹이란! 이전에 나의 삶을 버티어주던 것, 심지어 체포를 각오하게 해주고 투옥을 견디게 해주었던 모든 것이 사회주의 사회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전제와 관념 전체가 사회주의 사회와 함께 붕괴해버렸던 것이다.

희망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던 곳에서 절망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빠져버리게 된다. 심연이란 바닥없는 세계다. 붙잡을 것 하나 없고, 발 디딜 곳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자리, 그래서 그저 한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곳, 그게 심연이다. 허무의 심연. 이념이나 신념이란 게 가능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다면 얼른 ‘아, 이게 아니네. 그럼 다른 이념으로....’하고 옮겨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이전의 이념을 부정하며 누군 그 옆에 있는 이념으로, 누군 아예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걸었던 사람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이라면 모든 것이 붕괴된 심연 안에서, 그 허무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선사들이 학인들의 멱살을 쥐고 몽둥이질을 하며 해주려고 했던 게 이와 비슷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백척간두’의 절벽에서 바닥없는 저 아래로 한 걸음 내딛으라고 떠밀고, 붙잡을 것 하나 없는 ‘은산철벽’ 앞에서 올라가보라고 몽둥질을 한다니 말이다. 네가 가진 모든 전제와 관념, 네가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을 다 부수어 줄 테니,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저 깊은 심연 속에 뛰어 들어가 살아나와 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불법이란 그런 간절함, 그런 절박함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심연에서 결코 짧지 않은 허무의 시간을 허우적대며 얻은 것은 ‘물음’이었다. 이전에 갖고 있던 이런저런 답들 대신 그 모든 답을 의문에 부치며 출현한 물음들. 이 물음을 들고 나름 ‘행각’을 했다. 아니 하고 있다. 답이 있을만한 곳을 뒤지고 다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전에 보지 않던 것들을 보고 읽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덕분에 이전에 갖고 있던 믿음이나 전제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었고, 전에는 귀막고 듣지 않았을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흔히 전력을 다해 대결할 근본적 물음을 ‘화두’라고들 하는데, 나야말로 사회주의 붕괴 덕분에 평생을 들고 다닐 ‘화두’를 얻은 셈이다. 가르침을 주는 선지식은 만나지 못했지만, 삼년은 귀가 먹먹하도록 할을 당하고, 또 삼년은 눈앞이 캄캄하도록 몽둥이질을 당하는 행운을 얻었던 셈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지만, 이걸로 ‘대오’를 했다는 식의 건방진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전생의 공덕이 부족해서인지 ‘견성’은커녕 불법의 불(佛)자도 알지 못한 채 무명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정말 캄캄하기 그지없는 심연 속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심연을 본 자의 눈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같을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거기서 나와 다시 옛날의 자리, 예전의 이념으로 되돌아갔다고 해도 결코 같을 수 없다. 선사들에게서도 비슷한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깨닫고 보니 딱히 따로 깨달을 것도 없었고, 얻고 보니 따로 얻을 것도 없었다는 말을. 그러나 그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 나와 유사한 생각이나 이념을 가진 이는 많지만 저 어둠의 심연을 본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의 전제가 완전히 와해되는 일을 겪었다면,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말에 대해 그저 다르다고 쳐내며 자기 믿음으로 동일화하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심연 이후에 찾아낸 답이라면, 적어도 그저 입에서 나오는 ‘옳은 개념’이 아니라 그의 몸에 달라붙어 활발하게 작용하는 무엇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보다는 오히려 생각은 아주 달라도 심연을 본 적이 있는 이, 자신의 전제를 모두 놓아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한 이가 훨씬 더 존중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74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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