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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산이 생긴 연유

‘급고독’은 궁극적으로 몸 아니라 마음 치유하는 것

기수급고독원은 기수 왕자와 급고독 장자의 정원을 말한다. 하나의 정원에 두 사람의 이름이 붙은 것은 사연이 있다. 부호 급고독은 부처님께 수행처를 기부하기 위해 기타 왕자의 아름다운 동산을 사고자 한다. 팔 맘이 없던 왕자는 농담 삼아 동산을 금으로 덮으면 팔겠다고 한다. 실제로 금으로 덮는 걸 보고 감동한 왕자는 동산을 급고독과 공동으로 부처님께 기증한다. 이 동산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선다. 부처님은 이 동산에 자주 들르셨다.

자선왕의 외적인 자비행이
내적 지혜의 완성으로 향해
1250인은 다방면 마음 해탈

그런데 부호의 이름이 묘하다. 급고독이라니? 급고독은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핀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는 자선행이고 당시 말로는 보시행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사람이 성공해 보답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늙으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늙은 부모를 봉양하지만, 타인을 그중에서도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자선왕 부호의, 이 일화는 외적인 행에서 내적인 행으로 옮겨가는 걸 보여준다. 외적인 행은 내적인 철학으로 강화될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더욱 탄탄해지고, 밖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무지를 깨뜨린 해탈의 향이다. 사상은 행의 탈것이다. 내적인 깨달음은 외적인 행의 결정화(crystalization)이다. 그 결과 금강석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급고독은 궁극적으로 몸이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다. 보시에서 출발한 바라밀이 지혜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무한차원의 보시’인 자비로 나타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입전수수이다.

외적 실행은 내적 변용의 싹이고, 만개한 내적 변용은 외적 실행으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 구성원들이, 티내지 않는, 아니 낼 수가 없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경지에 가까이 갈수록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그리할수록, 지상은 천국에 가까워진다. 우리 마음이 위대한 이상으로 솟아오를 때, 수미산 위의 28개 하늘나라가, 지상에 피가 흐르고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위해 건설된다.

같이 탁발을 나간 1250인은 우리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 마음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소위 모듈(module)이다. 우리 마음은 대별하면 5온8식이고, 소별하면 5위75법이지만, 현대 뇌과학에 의하면 자그마치 수억 개이다. 그게 모듈이다. 이 방들은 각기 진화한다. 불교용어로는 해탈로 간다. 진화속도는 각기 다르다. 과학, 정치, 경제, 인문, 사회, 문학, 음악, 미술 등으로 각기 다르게 발달한다. 그래서 위인들 중에, 그중에서도 특히 위대한 수행자 중에, 형편없는 정치관, 경제관, 예술관, 생물관, 과학관을 가진 이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크게 경계할 일이다.

1250인은 마음이 다방면으로 해탈한 것을 나타낸다. 6바라밀 8정도를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육조 스님은 ‘단경’에서 ‘어찌 내 마음에 이 모든 것이 이미 다 갖추어진 줄 알았으리이까?’라고 노래 부른다. 주요 부위가 완성된 자의 마음에서 다른 부분들이 연이어 깨어난다. 그게 1250이다. 인류를 하나의 생명체로 연기체로 볼 때, 내적으로도 1250이고 외적으로도 1250이다. 부처님이라는 부위가 깨어남으로써 나머지 부위가 깨어나는 것이다. 이런 깨어남은 진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다. 삶이 무한한 신비로 가득한 이유이다.

태양이 최고도의 열기를 뿜기 전에 망고나무 숲을 지나 보리수 숲을 지나, 시냇물을 졸졸 건너, 새벽이슬에 부드러워진 풀잎을 밟으며, 대중은 마을에 다다랐다. 마을사람들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에, 내일도 오늘과 같이 고통이 만연할 세상에서, 그 모든 고통을 여읜 성중을 맞이했다. 침묵 속에서 평온과 행복을 발산하는 성스런 무리를 보았다. 그들의 현존에 암소도 마을도 평안해졌다. 각자 일곱 집에 들러 발우를 채운 후 동산으로 돌아왔다.

식사 후 발우와 손발을 씻고 옷을 갖추어 입고 자리를 편 다음 좌정했다. 마음은 앞으로 모아져 명징하기 그지없다. 군더더기가 없는, 조작, 시비, 취사, 단멸이 없는, 마음이 깨어난 이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내면의 발현이기에 여기에 ‘금강경’의 가르침이 다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말한 대로 ‘눈 있는 자는 보라!’ 도란 특별한 게 아니라, 주리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선불교는, 경전 속에 감금당한 깨달음을 일상으로 내몬다.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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