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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 물건도 없는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하

‘청정’이니 ‘법신’은 꽃나무 장엄한 울타리

▲ ‘본래무일물’ 고윤숙 화가


홍인과 혜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된 선의 새로운 궤적은 흔히 말하듯 여래장 사상과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래장 개념과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단적으로 소의경전이 여래장 사상의 ‘능가경’에서 여래장 이전 경전인 ‘금강경’으로 바뀐 것이 그렇다. 이미 불교의 가르침이 많이 확산되어 ‘무아’의 가르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보았던 것일까? 물론 이후의 선 역시 모든 중생들이 본래부처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위해 ‘여러분 각자마다 여래의 씨를 감추고 있다’는 식으로 직접 말해주기보다는 현행의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실행하도록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가르침의 방법이 달라졌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게 밀어붙일 때 오는 각성의 순간, 스스로 자신의 ‘본체’를, 본래부처임을 보게 했던 것일 게다.

홍인과 혜능 교차되는 시기 선의 궤적
여래장 개념과 떨어져 멀어지는 과정
불성 지우면 가르칠 방편 함께 사라져

혜능을 신수와 대비하여 부각시키는 홍인의 유명한 ‘게송 시합’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 아는 얘기겠지만, 홍인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깨친 바를 드러내는 게송을 써서 가져오라 한다. 그걸 보고 대의를 제대로 얻은 자를 가려 의발을 부촉하여 6대 조사로 삼겠노라고. 사람들은 모두 가장 뛰어난 교수사 신수 상좌가 그러리라고 믿었고, 신수는 법을 구하는 마음에서 게송을 지어 남몰래 스승의 방 앞 벽에다 붙여놓는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心如明鏡臺).
매일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먼지 붙지 않게 하리(莫使有塵埃).

홍인은 이 게송이 신수가 써 붙인 것임을 알고 불러 확인한 뒤, 이것으론 부족하니 다시 써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수는 그 다음 수를 두지 못하고 거기서 멈춘다. 반면 이런 이벤트가 있는 줄도 모르고 방앗간에서 일만 하던 행자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외우는 이를 보고 그에게 청해 신수의 게송을 읽어 달라 한다. 그는 글자도 읽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곤 그 게송과 대응되는 게송을 하나 지어 대신 써달라고 한다.

깨달음에는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도다(明鏡亦無臺).
불성은 늘 청정하거늘(佛性常淸淨)
어디에 티끌이 있을 것인가(何處有塵埃),

신수의 게송이 매일매일 번뇌방상을 닦아내 자신의 불성을 맑게 하자는 ‘점수’의 관념을 읽어내고, 먼지 앉은 곳이 없이 본래 청정하다는 혜능의 게송이 ‘돈오’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표준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능가경’과 여래장 개념을 기억한다면, 깨달음의 나무나 밝은 거울이 티끌로 더럽혀져 있지만 자성이 청정해 그것만 닦아 없애면 된다는 신수의 게송이 여래장 개념과 정확하게 일치함 또한 쉽게 알 것이다. 혜능이 ‘불성은 항상 청정하여 티끌이 낄 수 없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여래장 개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었다. 욕진에 물들 것도 없는, 먼지가 아무리 날려도 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법신. 그렇다면 혜능의 게송은, 그가 의식하고 있던 것은 아니라 해도, 분명 여래장이라는 관념을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인이 혜능의 손을 들어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와 나란히 등장하는 이야기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게송을 적어내라고 과제를 내주었을 때, 홍인은 자신의 방 앞에 있는 세 칸짜리 복도에 “능가경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나타나는 능가변상도”와 달마대사로부터 홍인 자신에까지 의발을 전수하는 그림을 화가 공봉 노진(供奉盧珍)에게 부탁해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림을 착수하기 전날 밤 신수가 그 벽에 게송을 붙여놓았고, 다음날 그림을 그리려 화가를 데리고 갔던 홍인은 그 게송을 보고는 노진에게 그냥 돈 삼만 냥을 주며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돌려보낸다. “[능가]변상도를 그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금강경’에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 하였으니 변상도보다는 이 게송을 남겨두어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하게” 하겠다면서(‘육조단경’, 24, 26). 물론 그 뒤에 혜능이 대필하여 써 붙인 게송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능가경’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그림이 ‘금강경’의 한 구절로 날아간 것과, 그 자리에 들어선 신수의 게송이 혜능의 게송으로 대체된 것은 동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나중에 ‘바람에 날리는 깃발’과 함께 ‘육조대사’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혜능의 가르침을 적은 ‘단경’을 보면, 불성의 자성이 청정하다는 말이 야기할 오해를 염려했던 것 같다. 하여 “청정함이란 형상이 없는 것인데도 청정함이란 모양을 세워 청정함을 보는 걸 공부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스스로의 본성을 장애하는 것이며 청정하다는 상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육조단경’, 66). 마음이란 본래 허망한 것이기에 마음을 보려하는 것이 헛된 것인 것처럼, 청정함을 보려는 것이야말로 청정함이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청정함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청정함’이란 흔히 깨끗한 상을 떠올리는 청정함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도 나쁜 것으로도 물들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어떤 조건이 오든 그대로 받아주는 법신이 청정법신이다. “그 자체로 청정하여 본성을 갖지 않으므로…좋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되고, 좋은 일을 생각하면 곧바로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그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있게 하는 성품을 청정법신이라고 합니다.”(‘육조단경’, 74~75) 물들지 않는다 함은, 그렇게 좋은 생각, 좋은 일이 일어나도 지나가면 다시 텅 비어 오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지나가면 그뿐일 뿐 달라붙지 못하는 법신, 그게 청정법신이다. 그럼에도 혜능 게송의 3행인 “불성은 본래 청정하다”란 말은 ‘청정’이란 말이 야기하는 ‘환상’(명언종자)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반복하여 오해를 야기했을 법하다. 그래서인지 돈황본 ‘육조단경’ 이후에 출판되어 유통된 대부분의 단경들에서는 그 게송의 3행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本來無一物)”
그러니 어디에 어떻게 먼지가 달라붙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훨씬 더 멋지고 깔끔해졌다. 다른 문구가 없었다면 여래장으로 해석될 수 있었을 청정한 불성이란 말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불어 ‘청정’이란 말이나 ‘자성’, ‘불성’이란 말이 야기할 오해의 여지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 물건도 없는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 이렇게 어떤 말도 달라붙을 여지를 없애버리고 나면, 사람들을 가르칠 방편도 같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후의 선사들이 불성이니 ‘본체’니 ‘청정법신’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 같다.
‘청정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가령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에게 묻는다.

“무엇이 청정법신입니까?”
“꽃나무로 장엄한 울타리니라.”
좋다는 말일까, 나쁘다는 말일까? 꽃나무로 장엄했다는 말은 나쁜 뉘앙스로 읽기 어렵다. 그러나 그래도 울타리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 막는 울타리인 것이다. 꽃나무가 장엄하여 넋을 잃곤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하게 하는 울타리. 더 난감한 울타리다. ‘청정’이니 법신이니 하는 좋은 말은 모두 울타리의 장식일 뿐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그 스님은 다시 묻는다.

“그럴진대 어떠합니까?”
“황금빛털 사자니라.”
비록 울타리지만 황금빛털 사자가 들어앉아 있는 울타리고 비록 울타리의 장식이지만 그 사자로 인도하는 꽃나무 장엄이란 말일 게다. 다시,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이 말을 두고 설두 중현(雪竇重顯)은 이리 평한다. “전혀 잡다함이 없나니/ 황금빛털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 ‘잡다함이 없다’, ‘청정하다는 말이다.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황금빛털 사자 역시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벽암록’에서 원오는 이렇게 쓴다. “황금빛털 사자를 보았느냐? 태양 같아서 정면으로 보았다가는 눈이 먼다.”(’벽암록‘, 중, 85) 이런 말들이 야기할 오해와 집착을 아예 반대 방향에서 깨주는 분도 있다. 가령 현사 사비(玄沙師備)는 청정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고름이 뚝뚝 떨어지느니라.” 법화 전거(法華全擧)는 같은 질문에 이리 답한다. “똥냄새가 하늘에까지 퍼졌다.” 어떠한가? 청정법신이 보이는가? 그대 눈에는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79호 / 2017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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