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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겨울 숲서 만나는 기쁨 몇 가지

기자명 김용규

상실 또한 삶의 한 부분임을 일깨우는 시간

사람들은 종종 겨울 숲에 머무는 감흥에 대해 내게 묻습니다. 춥고 시려 서글프지 않느냐? 적막하여 너무 쓸쓸하지는 않느냐? 황량한 겨울 숲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느냐, 또 뭘 느끼면서 살아가느냐?

내려놓는 의미 알아가는 건
겨울 숲 머무는 자만의 일미

입춘이 지난 지 보름이 가깝지만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사람들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양지바른 땅의 온도와 그 땅에 뿌리를 둔 풀과 나무들에게서는 이미 미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 지점에 대한 새들의 감응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분명합니다. 곤줄박이며 오목눈이며 박새며 까치 따위를 가만히 지켜보세요. 개울가 버들강아지를 보고 얇아진 두께의 얼음을 느끼고 녹아 사라진 물살 빠른 자리의 얼음 구멍을 흐르는 시린 계류에 손을 담가보세요. 그 움직임과 소리가 달라지는 것을 느껴보세요. 아직 당도하지 않은 봄을 서성이며 마중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것들이 겨울 숲에 머물면서 그 겨울을 가만히 응시하고 또 자신도 온전히 겨울이 되어 지내다가 마침내 겨울의 끝자락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아닐까 합니다.

겨울 숲과 함께 하는 기쁨은 겨울 숲의 끝자락에만 있지 않습니다. 겨울 숲의 입구에서도 우리는 또 다른 기쁨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가을의 끝, 그러니까 한편 겨울의 입구인 시간에 숲에 머물면 진짜 아름다운 것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살 수 있습니다. 물들어가는 것의 아름다움, 그 순리에 복종하는 것의 아름다움이 그것입니다. 온전히 제 빛을 드러내는 빛깔들의 향연이 차가워진 땅바닥과 함께 숲을 채우는 순간이 바로 겨울 숲의 입구입니다. 푸른 잎이었다가 단풍이었다가 낙엽이었던 것들이 다시 숲 공동체의 이불이 되고 마침내 흙이 되어가는 순간과 장면들, 그 저항치도 거스르지도 않는 생명들의 지혜를 마주하는 것이 초겨울 숲과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단풍들고 낙엽지우고 이불이 되어 썩어가면서도 나무와 풀들은 자신을 잃지 않고 겨울의 한 복판으로 들어갑니다. 그 개별 개별의 생명체들이 말없이 뒤섞이는 것의 곧고 구불구불한 아름다움을 우두커니 마주하는 기쁨, 벌거벗고 내려놓는 것의 의미를 알아채는 기쁨, 모두 겨울 숲에 머무는 자가 누리는 일미(一味)입니다.

하지만 겨울 숲에 머무는 기쁨의 진수는 대한과 소한, 북풍과 한설의 고비를 넘는 겨울 생명 세계의 적나라한 상실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 눈물겨운 상실의 속살 풍경 속에서 삶의 본질 한 가닥을 깨달음으로 끌어당겨 질척이고 비틀대는 삶을 야무지게 매만지고 곧게 일으켜 세우는 기쁨이 진짜로 큰 기쁨입니다.

봄부터 가을 한 복판까지 나무들은 모두 치열합니다. 나무는 그 생장의 시간동안 무수히 많은 곁가지를 뽑아 올리지만 곁가지 대부분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그라져야 하는 운명입니다. 빛을 향해 뻗어가던 곁가지 중 대부분은 위나 옆에서 자라는 자신의 혹은 다른 나무들의 가지나 줄기나 잎에 의해 빛이 가려지는 운명과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빛을 확보할 수 없는 그 곁가지와 거기 달린 잎은 사그라집니다. 잎은 져서 땅을 덮는 이불이 되지만 곁가지는 메마른 상태 그대로 줄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겨울 한 복판 나무들의 가지 끝에는 이제 하늘을 뒤덮었던 이불이 모두 낙엽으로 사라집니다. 줄기에 매달려 있던 메마른 나뭇가지들은 이제 숲으로 쏟아지는 눈과 거센 바람에 ‘툭-투-둑’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소나무의 경우 쌓이는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이따금 아직 살아있는 가지나 줄기마저도 ‘따-악’, 산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부러지며 숲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겨울 한 가운데 숲에는 그 내적 혹은 외적 상실의 시간이 고스란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그 상실의 시간을 겨울마다 겪으며 나무들은 자신의 꼴을 만들어갑니다. 겨울 숲 한 복판에 서면 나무들마다 품었던 욕망과 지워야 했던 상실이 지금 어디쯤에 이르렀고 또 다시 어느 방향으로 전환해 갈지 온전히 보입니다. 제 삶을 이끄는 것은 욕망만이 아니라 상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내게 얼마나 삶을 깊게 마주하도록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게 겨울 숲과 함께 지내는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거기 있을 것입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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