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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승의 초상화-진영(眞影)

기자명 정진희

깨달음 인가해 내리는 사자상승의 징표

▲ ‘의상대사 진영’, 14~15세기, 견본채색, 102.1×52.6㎝, 일본 고산사 소장.

입춘이 지났지만 꽃샘추위가 매서운 이즈음이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라는 노래가 심심하지 않게 들리는 졸업의 계절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계절에 졸업하면 이별하는 슬픔에 너무 깊이 몰입할까 심려하여 추위로 슬픔을 잊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의 졸업식은 언제나 추웠다.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마음은 이별의 슬픔에 젖기보다는 온통 빨리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선승이 가사·발우·불자와 함께
공부 완성 의미로 받는 졸업장
종파 내 유대관계 증명키 위해
여러 부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졸업장을 받았다는 말은 교육기관에서 과정을 마치고 그에 따른 학위를 수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전등(傳燈)을 중시하는 선불교에서 스승의 진영은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하며 내리는 졸업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정신적 세계의 경험 안에서 깨달음을 추구하였던 선승들에게 사제지간의 직접적인 계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덕 높은 스승의 수하에서 수련하였던 선승들은 공부가 완성되면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음을 나타내는 증표로 가사나 발우, 불자 등을 받게 되는데 스승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전법의 증표로 이용되곤 하였다. 수련이 완성되면 스승은 도가 제자로 이어졌다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을 인정하고 그 증표로 본인의 진영에 상징적인 찬문을 써 제자에게 증표로 주었다.

사찰에 모신 스님의 진영은 처음 그 절을 창건하셨거나 이후 크게 중창하신 스님들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깨달은 법이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법맥의 증표로 그려 모신 것이기에 불가에서 조사의 진영은 그림으로 그려진 ‘전등록’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목은 이색이 윤필암기에서 ‘(…)지금 나옹 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 나라에 퍼졌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처럼 나옹선사 진영은 시대를 달리 만들어진 여러 부가 전국 곳곳의 사찰에 모셔지고 있으며 동화사와 송광사의 지눌선사 진영과 같이 동일한 초본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도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법통의 확인과 수계를 증명하는 스승의 초상화는 종파 내의 유대관계를 증명하고 돈독히 하기 위해 여러 부가 제작되어 제자들에게 배포되기도 하였다.

▲ ‘의상대사 진영’, 1767년, 견본채색, 124.3×91.3㎝, 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 부산 유형문화재 제55호.

선인들의 문헌이나 기록을 보면 진과 영 모두 그 자체로서 초상화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불교미술에서 진영이란 단어는 선승의 초상화를 의미한다. 경전의 내용이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조성할 수 있었던 선사의 진영은 조사신앙을 표현한 종교미술이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에서 승려의 초상화는 부처님의 지혜를 의미하는 정상(頂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진영이나 정상 모두 가변적인 형체를 그리고 있지만 전신(傳神)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승려의 초상화이지만 예배의 대상이 된다.

813년에 제작된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에는 선사가 입적하시자 유명한 장인을 불러 선사의 신령스런 영정을 그렸다고 하였고 965년에 세워진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에는 정진대사가 입적하자 당시 왕이었던 광종의 명으로 비단으로 사면에 선을 두르고 금축(金軸)으로 장황을 한 스님의 영정을 만들어 영찬(影讚)을 써서 진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박인범이 쓴 범일국사(810~889) 진영의 찬문에서 ‘상(相)은 있었으되 나에게 이제 형(形)은 없네. 무형의 형을 그림으로나마 보리라’고 한 것처럼 고승의 진영은 거의가 승려의 입적 이후 만들어졌으며 흔치는 않지만 진영의 주인공이 직접 자찬을 기록한 작품도 남겨져 있다.

현재 전해져 오는 우리나라 승려를 그린 진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일본 고산사(高山寺)에서 15세기부터 보관해오던 의상대사 진영이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 있던 의상대사 진영을 보고 그대로 옮겨 그린 이모본으로 화면 가득 그려진 커다란 등받이가 달린 의자와 신을 곱게 벗어둔 족좌대(足座臺), 의자 위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스님의 모습 등이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 승려의 초상화인 정상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이와 같은 형태가 당시 고승 진영의 시대적인 양식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기록에 보이는 고려시대 진영은 다수가 임금의 명에 따라 왕실의 화원들이나 유명한 화가들이 제작에 참여하였기에 아마 고려불화에서 볼 수 있는 공교함과 필선의 유려함이 고승의 진영에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영은 훼손되면 그 모습을 그대로 이모한 뒤 원본은 땅에 묻거나 불태워 없애기 때문에 현재 남겨진 고려시대 진영은 한 점도 없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의상대사의 진영은 오랜 세월 여러 차례 이모본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변모를 거듭하였다. 불자를 쥐고 의자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전체적인 형상은 고산사 소장본과 유사성을 보이고 당시 초상화나 불화의 바닥장식으로 애용되었던 돗자리 문양이 생략된 이유도 전승되는 도상을 계승하여 이모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당시 인물화의 배경으로 유행하던 병풍이 등장하는 것과 같이 화면에는 부분적으로 새롭게 해석된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 사명당대사 진영’, 18세기, 견본채색, 122.9×78.8㎝, 대구 동화사 소장, 보물 제1505호.

우리나라 사찰에 소장하고 있는 진영 가운데 가장 시대가 이른 작품은 대구 동화사에 소장된 사명당대사 진영이다. 손에 불자를 쥐고 가부좌를 틀어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과 족좌대에 고이 벗은 신발 등 전체적인 모습이 고산사 소장 의상대사 진영과 많이 닮아 있다. 흰 장삼을 입고 선홍색 가사를 두르고 단정히 앉아 계신 모습에서는 온화함이 있지만 긴 수염과 날카로운 눈매는 승병장으로 활약하셨던 스님의 기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깨달음의 맥을 이은 스님의 모습을 그린 고승의 진영은 계속 옮겨 그려지는 과정에서 실제의 용모와는 멀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한 장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의상과 원효대사의 진영이 현재까지도 사찰에서 모셔지고 있다는 것은 스승의 형상을 그려 모심으로 스승의 가르침과 그 뜻을 항상 기억하겠다는 납자의 굳은 결심이 세월을 따라 천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길고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그들의 믿음과 정성이 놀라울 뿐이며 이 글을 쓰는 지금이라도 내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의 사진 한 장이라도 찾아서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그 뜻을 새겨야 될 것 같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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