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 형상 집착해 부처 구하지 말라

기자명 정운 스님

말과 침묵 그 자체가 불성구현

원문 :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이라고 해도 이 마음은 줄어들지 않으며, 부처가 된다고 해도 이 마음은 늘어나지 않는다. 6바라밀과 만행의 공덕을 본래 구족하고 있으므로 굳이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곧 고요해질 뿐이다. 만약 이 마음이 반드시 부처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형상에 집착해 힘써 정진해서 뭔가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망상에 빠진 것이요, 도와는 어긋난다.

세상 모든 것 마음이 만들어
마음변화 따라 세상 움직여
일상 그대로 불교적 삶이요
깨달아 있는 부처로서의 행

해설 :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는 곧 조사선의 중요한 수행 주제인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당나라 조사선 시대(8세기 초~9세기)는 선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던 시기이다. 그 당시 선사들은 즉심시불, 평상심(平常心) 언구를 가장 많이 활용해 수행했다. 즉심시불은 마조(709~788)선사의 말로 알고 있지만 이 용어는 ‘반주삼매경’과 ‘관무량수경’에 의거해 마조가 응용한 것이다. ‘마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부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독자 중에는 ‘즉심시불’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6조 혜능이 광동성 소관의 남화사에 머물기 이전, 15년간 은둔생활을 하며 보림(保任)을 하였다. 이후 혜능은 산에서 내려와 광동성 광주 법성사(현 광효사)에 들어가니 인종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마침 도량에서 학인 스님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와 깃발이 움직였다.

한 학인이 뜰에 있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옆에 있던 학인이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는 거다.”

두 학인의 논쟁이 끝나지 않자, 혜능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일화는 ‘육조단경’이 전하는 ‘비풍비번(非風非幡)’이라는 공안이다. 혜능의 말대로 깃발이 움직인 것은 바람에 의한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바로 깃발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듣고 인식한 그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보는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기 때문에 깃발이 보이고 소리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깃발이 움직이든 바람 소리가 들리든 거기에 마음 두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법이다.

원효 스님도 해골물을 마시고 읊었다고 하는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원 출처는 기신론]을 음미해보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요, 마음의 변화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다. 세상이 혼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이 나를 위해 변해줄 수는 없다. 내 마음이 변하고 내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고, 행복한 세계가 펼쳐진다.

세상이 나를 싫어한다거나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아무리 세상이 꾸짖고 비난해도 자신의 마음에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회두시안(回頭是岸)’이라고 했다.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인데, 고개를 돌리는 그 자리가 바로 피안[극락]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선의 진리는 고고한 선사들만의 고유 영역이 아니다. 어느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질척한 중생의 삶속에서 진주 같은 보석[진리]이 있는 것이다. 자! 다시 원고로 돌아가자. 그러니 화살을 밖으로 돌리지 말라.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발단됨이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포함한 주위 모든 세계[지인(知人) 포함]가 극락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원문에서 “6바라밀과 만행의 공덕을 본래 구족하고 있으므로 굳이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돈오적인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곧 고요해질 뿐이다”는 조사선적 관념에서 보면 일상생활 그대로가 불교적 삶이요, 깨달아 있는 부처로서의 행을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작용즉성(作用卽性)[=수연응용(隨緣應用)]’, 말하고, 행동하고, 침묵하는 작용 그대로가 불성의 구현인 것이다.

정운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saribull@hanmail.net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