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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

기자명 주수완

반 고구려 정서 속 목숨 걸고 신라 포교 나선 고구려 승단이 표상

▲ 고구려 스님들이 신라에 올 때마다 찾았던 모례의 집 근처에 세웠다는 도리사. 사실상 신라 최초의 절이다. 그들이 계속 모례의 집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백제의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반면, 이들에 둘러쌓인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였다. 이때 역할을 한 사람이 아도(我道) 스님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무려 네 사람의 아도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아니, 정확히는 세 명의 아도와 한 명의 묵호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연 스님 자신도, 또 학자들도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아도에 관한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담긴 기록엔
무려 4명의 아도가 등장

역사의 퍼즐들 맞춰보면
509년 신라 건너왔을 것

신라의 반고구려 정서로
모례의 집에서 숨어 포교

아도가 신라 들어오기 전
정방·멸구자 포교하다 순교

고구려 신라포교 증거는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

고구려서 제작된 불상이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

유포한 천불 중 하나 의미
고구려 넘어 신라 포교 뜻

우선 각각의 아도에 관해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아도는 권3 ‘흥법’ “아도기라(我道基羅)”에 전하며 미추왕(재위 262~284) 때 신라에 들어온 인물인데, 이는 ‘아도본비(我道本碑)’라고 하는 어떤 비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아도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의 3대 황제 조방(曹芳)의 재위시기인 정시(正始) 연간에 고구려에 사절로 왔던 아굴마와 고구려의 여인 고도령이 연을 맺어 낳은 아들이었다. 여인의 성이 ‘고’씨 인 것을 보면 그녀도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굴마가 중국으로 돌아간 다음 태어난 아도는 5세에 출가하고, 16세에는 고구려 사절단을 따라 아버지를 만나러 중국으로 건너가 3년간 불법을 배운 후 19세에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신라에 들어와 불법을 전했는데, 이때가 미추왕 때였다. 당시는 신라 사람들이 불교를 몰라 꺼려하였고, 심지어 아도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어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지내야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미추왕의 공주가 무의(巫醫)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들자 아도가 나서 이를 치료해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신라에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짓는 것을 왕실로부터 허락받았다고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 내용은 아도의 출생에 관해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우선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아도는 5세 때 출가했으므로 이미 3세기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372년, 즉 4세기 후반의 일이므로, 이는 성립되기 어렵다. 또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던 이차돈 순교와 연관된 흥륜사는 6세기 법흥왕 때 세워진 사찰인데, 미추왕대에 처음 세워졌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일연도, 현대의 학자들도 이 시기는 너무 빠른 것으로 보고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는 틀리지만 출생에 얽힌 이야기 자체는 분명 아도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아도의 기록은 권3 ‘흥법’ “순도조려(順道肇麗)”에 실린 내용으로, 372년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중국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를 뒤따라 374년 고구려에 들어온 아도 스님에 관한 것이다. 앞서의 아도, 혹은 다음에 설명할 실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와 법명이 같아 동일한 인물로 보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아도는 일단 고구려에 들어와 있다가 다시 신라로 건너가 포교를 한 셈이 된다. 이는 ‘고구려본기’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이 아도가 그 아도인지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 도리사의 ‘아도화상사적비’(1655년).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로 다른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나로 연결 지은 점이 돋보인다.

세 번째는 묵호자(墨胡子)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들어와 활동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일연도, 학자들도 사실은 아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다. 이 내용도 첫 번째 아도 이야기와 함께 “아도기라”조에 실려 있는데 출처는 ‘신라본기’라고 한다. 묵호자는 눌지왕(재위 417~458) 시기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왔는데 그도 역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실상 아도의 활동 연대가 널뛰기하는 바람에 조연인 모례 역시 덩달아 널뛰기를 하고 있다). 이때 양나라에서 사신이 와 향을 전해주었는데 신라에서는 향이 처음이라 사용법을 몰라 전국을 다니며 용법을 묻게 하였다. 이때 묵호자가 향 피우는 법을 알려주었고, 마침 왕녀가 병이 들자 향을 이용해 병을 치료해 주었다. 왕녀의 병을 치료해준 내용은 여기서 첫 번째 아도 설화와 겹치고 있다.

네 번째 아도는 묵호자에 이어 비처왕(재위 479~500) 때 신라로 건너온 인물이다. 이때에도 아도는 모례의 집을 찾았다. ‘삼국유사’는 의외로 이 네 번째 아도를 간략히 다루고 있다. 세 명의 시자를 데리고 왔으며, 수년을 머물다 병도 없이 죽었다는 내용뿐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아도를 언급한 것으로 생각되는 내용이 고려 1215년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 전한다. 묵호자에 이어 아도가 다시금 모례의 집을 찾아오자 모례는 “과거 고구려 승려 정방과 멸구자를 신라 사람들이 죽였는데 어떻게 또 오셨습니까” 하며 아도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묵호자와 아도가 비록 닮았다고는 하지만, 모례의 집에 수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불교 포교단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묵호자와 아도가 순차를 두고 신라에 건너온 별개의 승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닮았다”고 한 뜻은 ‘묵호자’가 한자 뜻 그대로 ‘검은 외국인’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표현이어서 묵호자나 아도가 모두 북방민족과의 혼혈이거나 혹은 서역출신이었기 때문에 이국적인 용모를 지녔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이외에 모례의 집 인근 아도가 머물렀다는 선산의 도리사에 있는 ‘아도화상사적비’나 ‘삼국사기’ 등 추가적인 사료가 있으나, 다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 네 명의 아도 설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이 네 명의 아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우선 아도의 출생 설화를 단서로 삼아야할 듯하다.

그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중국에서 사절단이 고구려로 건너와야 하는데, 중국 사절단이 고구려로 오는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92년 북위에서 사절단을 보낸 기록이다. 그러고 보면 3세기에 ‘위(魏)’에서 사절이 왔다는 첫 번째 아도의 기록은 실은 ‘북위(北魏)’에서 온 사절단의 기록이 잘못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아도의 실제 출생은 그 다음해인 493년경일 것이다. 또 그는 16세에 고구려 사절이 중국에 갈 때 아버지를 찾아 함께 떠났는데, 그러면 대략 508년쯤이 된다. 그런데 마침 이때에도 고구려에서 중국에 사절을 보낸 기록이 있다. 나아가 아도는 3년 후에 고구려로 돌아왔는데, 아마 그 시기에 파견된 사절단이 돌아올 즈음에 함께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508년, 509년에도 계속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였으므로 그들을 따라 돌아왔다면 매우 자연스럽다.

▲ 연가명불상 광배 명문 속의 ‘유포’ 범위는 한반도 전역, 나아가 일본도 포함된 것이었을 수 있다.

다음 단서는 아도가 신라로 들어온 후 중국에서 향이 신라로 전래된 것이다. 기록에는 양나라 사절이 향을 들고 왔다고 했지만, 사료에 의하면 양나라가 신라에 사절을 보낸 적은 없다. 대신 신라가 백제 사절이 양나라에 갈 때 함께 사절을 보낸 적이 있는데, 이때가 521년 법흥왕 때였다. 만약 509년경에 아도가 중국 북위에서 고구려로 돌아왔다면, 그리고 곧이어 신라로 들어와 10여년 간 포교활동을 하다가 신라 왕실에 불려갔다면 모든 것이 비교적 무리 없이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는 실제로는 509년 이후 신라에 건너왔으며, 순도에 이어 고구려에 왔다는 아도와는 동명이인인 듯하다. 남은 문제는 묵호자와 아도의 관계다. 법흥왕대의 아도는 실제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물이었을까? 묵호자는 상상의 인물일까?

그런데 ‘삼국유사’ 권1 ‘기이’ “사금갑(射琴匣)”조에는 비처왕(재위 479~500)이 거문고 상자 안에서 정을 통하고 있던 궁궐 내전 분수승과 궁주를 처벌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는 비처왕 시기에 이미 불교가 전해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 앞서 언급했듯이 아도가 모례의 집에 왔을 때 모례는 고구려승 정방과 멸구자가 신라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아도 이전에 이미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비처왕에게 죽음을 당한 분수승도 사실은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교탄압을 받아 누명을 쓰고 순교한 고구려계 승려가 아니었을까? 실제 신라는 묵호자가 건너온 시기인 눌지왕 때부터 반고구려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묵호자나 아도가 숨어서 포교를 했던 것은 이러한 반고구려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굳이 고구려 승려들이 목숨을 걸고 신라에 잠입해 불교를 전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순수한 종교적 염원이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묵호자, 아도 등이 서역출신이다, 북위와의 혼혈이다 하는 것은 신라의 이러한 반고구려 감정에 대해 그나마 외국인 여권을 지닌 승려들을 포교단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신라 안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보려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활동은 마치 영화 ‘미션’에서 목숨을 걸고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연상케 한다.

이렇듯 애틋한 고구려 승단의 신라 포교 활동이 남긴 흔적이 하나 있다. 바로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인데, 539년 기미년에 고구려에서 만들어 ‘유포(流布) 시킨’ 천불 중 하나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그런데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경상남도 의령이었다. 지금까지 고구려 불상이 신라 땅에서 발견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만 치부되었다. 그러나 명문에 등장한 그 ‘유포’라는 단어의 뜻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교단이 생각한 유포의 범위는 단지 고구려의 영토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실은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걸쳐있었던 것이다. 아도의 염원이자 이차돈의 염원이었던 흥륜사의 착공 후 10여년, 고구려계 승려들의 순수한 포교활동은 이제 경남 지방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81호 / 2017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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