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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의식이 고를 낳고 멸한다

천지창조는 신이 아닌 의식의 탄생서 시작

모든 생물은 난생이다. 물고기이건 짐승이건 난자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자가 없으면 안 되므로, 정자와 난자 사이의, 인연생이다. 그러므로 난생이 아니라 정난생(精卵生)이란 말이 옳다. 예외가 있기는 하다. 수개미를 비롯한 일부 곤충과 물고기는 난자 홀로 부화해 탄생한다.

의식은 연기이자 연기법 소산
진화 거치며 수없이 업데이트
의식이 번뇌감옥에 가두지만
의식 없으면 열반도 불가능

동료교수가 ‘습한 데서 벌레가 저절로 생긴다’고 주장해서 크게 놀란 적이 있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분처럼 생각했다. 그게 화생(化生)이다. 생명체가 부모도 없이 홀연히 생긴다. 단세포 생물은 전설의 사리처럼 스스로 분할한다. 분할생이다. 이게 진정한 화생이지, 지옥중생이나 천국중생이 화생이 아니다. 독감균 같은 바이러스는 자체생식 능력이 없어 다른 생물체의 힘을 빌려 증식하므로 기생생(寄生生)이다. 모두 유전자생이다. 유전자 복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왜 고통 없는 열반의 땅으로의 인도가 그리 중요했을까? 불교의 선언은 '고'로 시작한다. (식물에게는 의식이 없으므로 고도 없다. 동물에게는 의식이 있지만, 하등동물은 자의식이 없고, 자의식이 있는 고등동물도 아직 자기 마음에 대해 모르므로 ‘고’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불교적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죄도 의식이 없으면 못 짓고 벌도 의식이 없으면 못 받듯이, 열반도 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럼 누가 (우리에게) 의식을 주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의식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이 고통에 빠지게 했을까? 의식은 연기이다. 연기법의 소산이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 수없이 업데이트 된 하드웨어(몸과 뇌)와 소프트웨어(몸신경망과 뇌신경망)의 산물이다. 의식은 근·경·식 삼자의 연기물이자 연기현상이다.

의식과 더불어 이 세상이 새롭게 인식되므로 의식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다. 예전의 내가 죽고, 의식을 통해,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것에 해당한다. 천지창조는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후에 일어났다. 천지창조로 아담과 이브가 생겨난 게 아니다. 거꾸로다. 의식의 탄생이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의식이 천지를 창조한다. 정신세계를 창조하고 죄를 창조한다. 스스로 죄를 물리어 땀 흘려 일해야 하는 고통을 벌로 받는다. 의식의 탄생은 정신적 고의 탄생이다. 의식은 우리를 고(번뇌)의 감옥에 가둔다. 신경계의 발달은 육체적 고라는 감옥에, 대뇌신피질의 발달은 정신적 고라는 감옥에 가둔다. 신경계와 대뇌신피질을 유지한 채로 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단한 난문이다. 인류역사는 이 문제에 대한 투쟁이다. 심지어는 문제 자체가 틀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므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없고, 따라서 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힌두교와 참나불교와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주장이다. 외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브라흐만 참나 의식만 존재하고, 그들의 꿈이 모든 물질 비물질 현상이므로, 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라운 하지만 황당한 주장이다.)

그건 세상이 고라는 자각으로 시작한다. 부처의 고는, 부처 자신의 고로 시작하지 않았다. 타자의, 타존재의 고로 시작했다. 벌레가 새에, 새가 매에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대한 목격으로 시작했다. 의롭고 자비로운 신의 보살핌 아래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윈은 자연계에 만연한 불합리한 고통을 목격하고 신을 버렸다. 나나니벌은 침으로 곤충 애벌레를 마비시키고 거기에 알을 낳는다. 부화한 벌 유충은 살아있는 애벌레를 파먹으며 큰다. 이런 사례에 다윈은 충격을 받았다.

서양 무신론의 근저에는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중생계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이로부터 ‘믿음이 강요된 신의 섭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홀로코스트이다. 유대인들은 600만 명이나 학살당하고 깨달았다. 신이 없다는 걸. 그래서 신을 버렸다. 유대인 중에 불교도가 많은 이유이다. 사유에 능한 그들은 사유의 종교 불교를 택했다. 이들은 달라이라마를 통해서, 새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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