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엄마가 때린다 울고
엄마는 운다며 때리는 상황
자비로운 훈육이었더라면
울음소리는 금세 멈췄을 것
한번은 제주도 젊은 신도와 이야기하는 중에 자신은 육지로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제주만의 일이겠는가. 지방에 사는 젊은이들은 누구나 상경을 꿈꾸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것이 우리시대의 모습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뒷이야기가 사뭇 흥미로웠다. “나는 기차도 없는 제주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는 것이었다. 육지에 살면서 언제나 편리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기차 타는 일이 어느 곳에서는 한사람의 인생의 꿈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 누군가의 갈망 때문이 아니라도 그냥 나는 기차 타는 일이 좋다. 요즘은 KTX라고 부르니 어감이 감칠 나지 않아서 나는 늘 기차라고 한다. 심지어는 먼지 때문에 잘 타지는 않지만 지하철을 탈 때도 기차를 탄다고 한다. 사람들이 의미를 잘 전달 받지 못해서 당황해하기도 하지만 그냥 기차라는 말이 좋고 기차 타는 일이 좋다. 기차를 타노라면 뭔가 자신을 행복 가득한 꿈나라로 실어다 줄 것 같은 유아적 상상에 젖어들곤 한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데 어린아이가 계속 울었다. KTX가 아닌 무궁화호 기차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사람을 히스테릭한 느낌으로 몰아넣는다. 무슨 일인가 자리를 옮겨 가 보았다. 그래도 남의 일이라 뭐라 급히 말하지 못하고 잠시 살펴봤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가 하고…. 살펴보다가 핵심적 이유를 알고는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엄마가 때리니까 울고, 엄마는 운다고 때리며 둘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40이 가까운 어른과 4살배기 아이가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물론 세세한 사정은 더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너무 어이가 없었다.
가끔 아이들 훈육에 관해 부모들께 훈수하거나 꾸지람을 하면 “스님은 아이를 안 키워봐서 모릅니다”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기차 울음 사건이후에는 당당히 말한다. “안 키워 봤어도 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고.
우리들은 모든 걸 경험이 우선인 듯 말하지만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것은 간접경험을 실체화 하는 탁월한 능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능력이 우리 인류를 위대한 깨달음의 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어도 부처님의 자비한 가르침을 듣고, 믿고, 자신이 체험 한 것 보다 더 단단한 체험적 실체로 받아들이고 수행에 매진하는 수행자들을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다.
그날 기차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그 자리를 지나쳐야만 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듯이 어머니와 아들은 즐겁게 기차여행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지 않아 울던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고집스러운 신경전에서 계속 승리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른들은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른들은 늙어가고 아이는 더더욱 젊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싶다. 그날 아이는 어머니가 사준 과자 때문이 아니라 기차여행이었기에 쉽게 화해하고 울음을 멈췄으리라. 그 아이도 크면 언제나 기차 타는 일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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