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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안에서 시와 휴먼퍼스트가 노닐다

  • 교계
  • 입력 2017.03.21 15:28
  • 수정 2017.03.23 11:23
  • 댓글 0

선스승 노만 피셔, 3월20일 시인 고은 방문

▲ 선스승 노만 피셔(Norman Fischer, 72)가 3월20일 수원 광교 고은(85) 시인 자택을 방문했다.
같은 듯 달랐고 다른 듯 같았다. 시 쓰다 출가한 서양인, 출가했다 시인이 된 동양인 그 둘이 서로 합장했다. 다르마프렌즈가 초청해 첫 방한한 미국 선스승 노만 피셔(Norman Fischer, 72)가 3월20일 수원 광교 고은(85) 시인 자택을 방문했다. 출국 며칠을 앞두고 팬을 자처한 노만 피셔가 시간 쪼개 고은 시인을 찾았다. 만나서 영광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합장으로 서로와 마음 맞춘 노만 피셔와 고은은 집 앞마당서 10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고은이 노만 피셔에게 ‘휴먼퍼스트’ 메시지에 강한 인상을 받았노라고 전했다. 노만 피셔가 방한 첫 기자회견 때 언급한 ‘휴먼 퍼스트’를 기억했다. 당시 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를 묻는 질문에 재치 있게 ‘휴먼 퍼스트(Human First)’로 답했다. 공기, 물, 바람, 흙 등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휴먼’이라는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불성을 공유하고 나누는 ‘휴먼’을 강조했다. 그 모든 존재가 ‘나’에게 연민과 사랑을 보내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가 오랫동안 선에 몰입하면서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노만 피셔는 구글 명상 프로그램 ‘내면검색(Search Inside Yourself)’에 선불교를 접목시킨 인물이다. 1946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태어나 서양에 선을 전한 일본 조동종 순류 스즈키(Shunryu Suzuki, 1904~1971)의 제자로 선맥을 이어가고 있다. 선불교를 서양문화 토양에 맞게 바꾸려는 에브리데이 젠 공동체(Everyday Zen Foundation)를 설립하고 상임법사로 활동 중이다.

▲ 한국 역사를 공부하다 고은의 ‘만인보’를 읽게 된 노만 피셔는 직접 영문판 시집을 들고 왔다. 겸손하게 고은의 자필 서명을 청했고, 고은이 서명 뒤 건넸다.
노만 피셔는 고은의 환대에 이렇게 화답했다. “당신이 시로 표현하고 있는 화엄과 비슷하다.” 웃음이 오갔다. 고마움에 대한 격식은 합장이면 족했다. 고은은 노만 피셔를 거실로 안내했고, 간단한 다과와 차를 두고 1시간 가깝게 환담이 이어졌다.

노만 피셔
출국 전 시인 고은 자택 찾아
‘만인보’ 팬 자처…1시간 환담
영문판 시집 자필 서명 요청
“삶 애환 동행한 보살” 극찬

고은 시인
노만 피셔 ‘휴먼퍼스트’ 발언
물·공기·인간 등 아우른 뜻에
강한 공감 표하며 화엄 언급
차 한 잔에 詩·禪 짧은 대담

한국 역사를 공부하다 고은의 ‘만인보’를 읽게 된 노만 피셔는 직접 영문판 시집을 들고 왔다. 겸손하게 고은의 자필 서명을 청했고, 고은이 서명 뒤 건넸다. 노만 피셔도 자신의 시집과 저서에 서명한 뒤 고은에게 전했다. 둘은 연신 자애롭게 웃었다.

둘의 인연은 1990년대로 거슬러 간다. 고은이 1999년 미국 버클리대학 초빙교수 시절 이야기를 꺼내서 밝혀졌다. 고은은 센프란시스코 젠 센터를 방문했지만 당시 주지였던 노만 피셔를 만나지 못했다. 노만 피셔는 1995~2000년 젠 센터 주지를 역임했다. 인연의 끈이 2017년 3월 봄에야 이어진 셈이다.

둘은 시와 언어 그리고 선의 관계를 대화했다. 시가 언어의 감옥이지만 선이 해방시킬 수 있고, 시 스스로가 노래하기 위해 시인이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시인을 도구로 해서 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노만 피셔)
“은사 효봉 스님이 첫 만남서 문자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은 침묵이지요. 언어가 없는 곳이에요. 그러나 언어가 침묵의 쓰레기가 아니고, 침묵 역시 언어의 묘지가 아닙니다. 침묵도 저절로 뭔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시입니다. 침묵 스스로 노래하고 있지요. 춤도 누가 추라고 해서 추는 게 아닙니다. 자가자무(自歌自舞)입니다. 시인은 나비입니다. 나비가 꽃가루 묻혀 수정시키듯 시인은 나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뿐입니다.”(고은).
“인간의 깊은 내면의 표현이 언어입니다. 선은 언어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언어 감옥에 갇히지 않듯 시인도 평생 벗어나려고 해야합니다.”(노만 피셔)
“언어는 수많은 세월 거쳐 응결됐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행위입니다. 불완전하기에 계속됩니다. 저는 아직도 세계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겨우 머리카락 한 올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나를 반길 때 꼬리치는 그 기쁨조차 표현할 길 없어 절망합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도 절망합니다. 그럼에도 난 이 언어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절망이 내 시를 만듭니다. 언어도 나 역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고은)

▲ 노만 피셔는 시인 고은과 그의 서재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노만 피셔는 ‘만인보(萬人譜)’를 꺼냈다. 고은이 1986년부터 역사 속에 스러져가는 존재 모두에게 숨을 불어 넣은 역작이다. 5600여명의 인물을 총 4001편의 시로 썼다. 특히 이름 없이 살다간 존재들의 삶과 고통, 애환을 담았다.

“스님 생활이 시인으로서 언어의 방식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계속 함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항하는지 궁금합니다.”(노만 피셔)
“출가는 자석에 작은 못 눌러 붙듯 했습니다. 10년 동안 출가생활을 했지요. 메뉴로 있지 않고 먹어서 소화든 설사든 피 한 방울이 됐든 불교라는 개념이나 상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만인보’는 보살의 시로 읽힙니다. 모든 이의 삶을 향해 깊은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기억에 맞서지 않고 긍정하지도 않지만 동료애가 있다는 게 제 시에 대한 어떤 평가입니다. 정확히는 ‘만인보’가 그렇습니다. 날 세우는 시보다 고통 어린 삶을 끌어안는 동행이 있습니다.”(노만 피셔)
“많은 칭찬을 들었지만 처음 듣는 칭찬이네요. 딱 맞습니다. 해주신 말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은)

▲ 고은이 서재를 소개시켰다. 방대한 서적과 집필 중인 원고를 본 노만 피셔는 열정적인 시인 모습에 놀라며 존경을 표했다.
문득, 노만 피셔는 통역이 제대로 되고 있는 지 고은의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웃으며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고은은 “마음이 언어를 타고 갈 때 늘 부족하다”고 했다. 노만 피셔가 덧붙였다. “우린 언제나 서로를 오해한다. 하지만 사랑한다.” 고은과 노만 피셔 둘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만큼 늘 신비롭다고 마주 보며 웃었다.

고은이 서재를 소개시켰다. 방대한 서적과 집필 중인 원고를 본 노만 피셔는 열정적인 시인 모습에 놀라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직접 고은 시인을 사진에 담고 싶어 했다. 즉석에서 고은은 시집 한 권에 서명을 담아 스님에게 건넸다.

고은은 자신을 낮췄다. 승가에서 나와 시 쓰는 이보다 시 쓰다 승가로 들어간 노만 피셔를 존중했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어 친근하다고 했다. 환담 끝자락 “참 좋다”라고 표현한 고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 외 다른 언어는 사족이었다.

수원=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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