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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스리랑카 성지순례②-쿼드랭글 사원

불치 스리랑카 이운, 탐심 벗고 불심으로 내린 결단

▲ 바타다게(Vatadage)는 ‘불치사리를 봉안한 둥근 사원’이란 뜻이다. 7세기 조성된 이 사원을 12세기 니상카 말라 왕이 재건축해 불치사리를 봉안하고 바타다게로 이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중에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를 만났다면 플론나루와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실은 호수가 아닌 대형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라’다. 파라크라마(Parakrama)는 이 도시에 아름다운 사원과 거대한 저수지를 조성한 파라크라마 바후1세(1153~1186)의 이름을 딴 것이고, 사무드라(Samudra)는 싱할라어로 바다를 뜻한다. 바다를 품은 저수지다.

탄핵·쿠테타 직면한 마하세나
칼링가국에 불치이운 ‘급전’
전쟁 속 사리 침탈·훼손 우려
구하쎄바, 딸에게 이운 언명

위자야바후, 촐라 족 격퇴 후
수도 이전하며 사리이운 단행
‘아타다게’ 파괴돼 석주만 남아
‘원형불치사’가 옛 융성 보여줘

파라크라마 사무드라가 내어주는 물줄기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도시. 이 땅의 왕은 여기에 도읍을 정한 후 왕궁을 지으면서도 사원불사를 잊지 않았다. 왕궁 바로 옆 공간에 사각형 모양의 정원을 조성하고는 그 안에 사원과 탑 등 11개의 건축물을 성스럽게 빚어 놓았다. ‘쿼드랭글(quadrangle) 사원’이다. 이역만리 성지서 제일 먼저 합장 올리고 싶은 사원은 플론나루와에서 부처님 치아사리를 최초로 봉안했던 아타다게(Atadage).

▲ 플론나루와 최초 불치사 아타다게(Atadage). 아타는 8을 가리키므로 ‘8각 불치사’라는 뜻이다.

싱할라왕조의 최초 도시 아누라다푸라는 11세기 접어들며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인도 남부의 촐라 왕조에 의해 초토화됐다. 고대에 건축된 수많은 사찰이 파괴됐고 단 한 명의 비구니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촐라를 섬에서 몰아내고(1070) 아누라다푸라를 회복한 인물은 위자야바후 1세(1059~1114). 그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플론나루와로 옮겼고, 미얀마에 승려와 경전을 요청하며 상좌부 불교 중흥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 때 아누라다푸라에 있던 부처님 치아사리(불치사리)를 이운해 와 저 사원에 봉안했다.

그런데 왜 아타다게일까? 다(da)는 치아이고 게(ge)는 사원이니 ‘다게’란 ‘치아를 모신 사원’을 뜻한다. 그런데 ‘8’을 가리키는 ‘아타(Ata)’는 왜 붙어 있을까? ‘8개의 불치사리를 모신 사원?’ 아닐 것이다.

▲ 하타다게(Hatadage) 전경. 하타는 60을 가리키므로 ‘60각 불치사’라는 뜻이다.

아타다게 옆에는 플론나루와에서 두 번째로 불치사리를 봉안했던 사원 하타다게(Hatadage)가 서 있다. ‘하타’는 ‘60’을 의미한다. ‘60개의 불치사리를 봉안한 사원’이란 풀이는 분명 맞지 않을 터. 8과 60은 불치사리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이운 된 불치사리는 1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열반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인도 땅을 지배하고 있던 8개 부족은 기상(騎象), 기마(騎馬), 수레, 보병 부대 등을 동원해 열반지로 와 다비를 한 말라족에게 부처님 사리를 요구했다. 말라족은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땅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 백성들이 존엄히 모실 겁니다. 사리는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 걸음으로 여기까지 와서 겸손하게 유골의 일부를 청했소. 그럼에도 주려 하지 않는다면 힘으로 얻어 낼 것이오!”
“그대들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 또한 목숨 다해 대항할 것이니 두려울 게 없소!”

▲ ‘바위(Gal) 책(Po tha)’과 수미산 상징 탑 ‘사트마할 프라사다’.

일촉즉발의 순간 마갈타국(마가다국) 아사세 왕이 보낸 사신 도나가 나섰다.

“우리는 모두 입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모든 중생을 안락의 세계로 이끌겠다는 원력을 세운 불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두고 서로 죽이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래께서 사리를 남기신 것은 널리 이익 되게 하고자 함이니 이 사리는 마땅히 나누어야 합니다.”

사리를 독차지하겠다고 욕심 부렸던 말라족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동의했다. 부처님 사리는 도나의 손을 거쳐 8개 부족에게 분배됐다. ‘아함경’에 따르면 아사세왕에게는 부처님의 윗어금니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인도의 칼링가 구하쎄바 왕이 스리랑카 시리메가완나 왕에게 보낸 사리는 아사세왕이 품고 있던 그 윗어금니일까?

칼링가(Kalinga)는 인도 중동 부근의 오리사(Orissa)와 안드라프라데시 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이 땅에서 번영을 꿈꾸며 삶의 터전을 일군 왕조가 ‘칼링가 왕조’인데 인도 고대 16개국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약소국이다. 이 칼링가 왕조를 무너뜨린 왕조가 마우리아 왕조이며 당시의 왕이 아소카 왕이다.

칼링가 전투에서 아소카 왕은 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불교에 귀의하며 칼을 내려놓고 다르마로 통일국가를 통치한다. 이미 전쟁으로 그려진 지옥도를 여실히 보았던 아소카 왕은 왜 하필 칼링가를 정복하며 참회했을까? 혹, 칼링가의 불치사리 위신력이 그에게 전해졌던 건 아닐까?

‘대열반경’을 펼치면 의미 있는 게송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치아 하나는 삼십삼천이 예배하고/ 하나는 간다라의 도시에서 모시고 있다/ 칼링가 왕이 다시 하나를 얻었으며….’

경전에 새겨져 있다. 칼링가 왕이 불치사리를 얻었다고! 이미 부처님사리는 8개 부족으로 나눠졌는데 어찌된 일일까? 정기선 선생의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 논문을 통해 정리해 보면 이렇다.

▲ 계단 앞 문스톤(Moon Stone). 코끼리, 말, 사자, 꽃 등을 통해 윤회와 해탈을 상징한다.

부처님 사리가 8등분 되었을 당시 4개의 불치사리가 불에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사리는 도리천의 삭까천 왕과, 나가(Naga. 용신 龍神)의 왕이 이운해 갔고, 1과는 간다라로 갔으며, 남은 1과는 아라한 케마 존자가 모시고 있다가 칼링가국의 왕 브라흐마닷따에게 전해졌다. 부처님 치아사리는 스리랑카로 이운되기 전까지 800여년 동안 칼링가 땅이 안고 있었던 셈이다. 

싱할라 왕위에 오른 마하세나(334~ 362)는 정통 상좌부 승단을 대표하는 대사파(大寺派)를 억누르고 신생 종파인 무외산파(無畏山派)를 지원한다. 일설에 따르면 대사파 스님들의 대중공양을 금하고, 대사파 소속의 사찰을 헐어 그 자재로 무외산파의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대사파를 지지하던 싱할라족은 배신감을 느끼고 왕에게 등을 돌린다. 탄핵국면에 접어든 셈이다. 왕의 절친한 친구이며 신하였던 메가완나아바야는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쿠테타에도 직면했다.
위기감을 느낀 마하세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사파와의 화해를 시도하지만 이미 신뢰는 깨졌다. 그래서일까? 마하세나는 그 즈음 칼링가국에 SOS를 친다.

“스리랑카의 보물을 다 드리겠습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주십시오!”

칼링가 왕조는 처음엔 거절했으나 이내 스리랑카로 사리를 보낸다. 보물을 얻기 위한 탐심이 일어서가 아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리를 보호하려는 지극한 불심에 따른 결단이었다.

당시 칼링가는 부처님 치아사리를 손에 넣으려는 주변국들에게 잦은 침입을 당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크게 패할 것’이라 직감한 구하쎄바(Guhaseeva) 왕은 전장에 나가기 직전 시집간 딸 헤마말라와 남편 단타구말라를 불러 당부한다.

‘부처님 사리를 스리랑카 마하세나 왕에게 전하라!’

헤마말라는 사리를 탐하는 이들의 눈을 피하려 틀어 올린 머리카락 속에 사리를 숨겨 스리랑카로 입국한다. 마하세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에 사리를 친견할 수 없었다. 불치사리는 새롭게 즉위한 마하세나의 아들 시리메가완나(362∼409)에게 전해졌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땅에 부처님 치아사리는 이렇게 이운됐다.

하타다게 앞에 바타다게(Vatadage)가 웅장하게 서 있다. ‘바타(Vata)’는 원형을 뜻하니 ‘불치사리를 봉안한 둥근 사원’이란 뜻이다. 다른 다게에 비해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유적은 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싱할라 왕조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 두고 있을 때 조성된 사원이다. 그런데 12세기 니상카 말라(Nissanka Malla, 1153∼1186) 왕이 이 사원에 불치사리를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 조성된 이 사원을 재건축해 불치사리를 봉안하고 바타다게로 이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타가 ‘원형’을 가리키는 점을 감안하면 아타, 하타도 사원의 전체적인 형태와 연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마하위하라 주지 담마까띠 스님은 “건물 모양에 따라 이뤄진 각(角)의 수를 이른다”며 “8개 각으로 조성된 불치사, 60개의 각으로 건축된 불치사란 뜻”이라고 한다. 8각 불치사, 60각 불치사, 원형 불치사. 역시 세 사원을 관통하는 코드는 모양이다.  

세 개의 불치사원 옆에는 스님들이 전하는 경전을 왕이 경청하던 공간 라타만다파(Lata Mandapa)가 있고 그 옆에는 깨달음을 위해 숨 하나까지도 관조했던 사람들이 앉았던 도량 보디사트바(Bodhisattva)가 있다. 치아사리를 참배하며 얻은 환희심을 풀어 놓으며 부처님께 예를 올렸던 투파라마(Thuparama)는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방향을 틀어 다시 북쪽으로 걸음하면 수미산을 상징하는 7(Sat)층 탑(Prasada) 사트마할 프라사다(Satmahal Prasada)도 감상할 수 있다. 

플로나루와에 간다면 도시 중심에 자리한 왕궁과 퀘드랭글 사원에서 긴 시간을 두고 조용히 산책해 보시라! 위자야 바후 1세부터 니싼카 말라(Nissanka Malla, 1153-1186)왕에 이르기까지 200년 동안 플로나루와가 꽃피운 불교문화를 올곧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스리랑카=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정기선 논문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 불교평론 69호, 마성 스님, ‘스리랑카불교의 역사와 현황’.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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