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기자명 이중남

탄핵 정국 훨씬 이전부터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간결한 구절은 구호 겸 노랫말로 만들어져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헌법수호 의지가 없는’ 통치 권력에 대한 파면이 결정되자 과거 어느 때보다 헌법적 기본질서와 가치에 대한 자긍심이 고조되고 있다.

‘1987년 체제’는 부인할 수 없는 몇몇 결함을 갖고 있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국민적 열기를 등에 업은 여야 정치 지도자 몇몇이 충분한 공론 수렴 없이 졸속으로 합의했다는 발생사적 결함도 있고, 최고 권력 유고시 승계 공백 문제라는 헌법학적 결함도 있다. 급변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에 오래 전 제정된 규범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 지도 오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시민들은 이 헌법과 체제를 아끼고 사랑한다. 구구한 헌법 규정까지는 잘 몰라도, 잘난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갑남을녀들, 이 헌법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존엄과 행복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離苦得樂]” 점에서 평등하지만, 실제로 부와 능력, 학력, 직업과 같은 선천적·후천적 요소들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헌법 제11조 1항은 평등을 헌법적 가치로 천명한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평등은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적인 전제다.

그런데 일각에는 차별금지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일부 종교계 지도층들이 그 핵심에 있다. 그 논지를 들여다보면, 성적 소수자나 종북 좌파에 대한 차별을 금지·처벌하는 것은 ‘비정상’인 ‘소수’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정상’인 ‘다수’를 범죄화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이다.

근세에 서구가 길고도 참혹한 종교전쟁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 터득한 선의의 무관심(benign neglect)이나 정교 분리라는 지혜는 간 데 없고, 이웃 종교-특히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의식이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헌법적 당위를 비정상인 소수이거나 적대 종교인데 뭐 어떠냐’고 거부하는 셈이다.

지난 10년간 차별금지법은 여러 차례 입법이 시도되었지만 번번이 좌절되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7년과 2012년에 거듭 한국이 다문화 사회임을 인정하고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이 역시 법사위에서 안건 상정조차 쉽지 않다.

지난해 총선에서 차별금지법 반대와 이슬람에 대한 적대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나선 두 개신교 정당의 지지율 합산치는 3%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 결국 헌법적 가치에 반할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열세인 세력이 마치 거부권이라도 가진 양 초헌법적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올해 초 조계종 총무원장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특권과 차별 없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 차별금지법이 입법되도록 최대한 나서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오는 10월에 만료되는 임기 안에 입법을 촉진할 만한 복안을 마련하고 나온 발언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일선에서 차별에 시달리며 저항하고 있는 소수자들에게는 발언 그 자체만으로 힘이 되었다.

봉축위원회가 발표한 올해 표어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역시 헌법 정신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모든 종류의 차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대자유의 가르침이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교계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범종단적 의제로 설정하고 인내심을 갖고 장기 과제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중남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운영위원 dogak@daum.net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