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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말해보라, 목구멍과 입을 닫은 채-상

지고의 도란 말로 명명되는 것 바깥에 있다

▲ ‘불이법문(不二法門)’고윤숙 화가

‘벽암록’에서 원오 불과(圓悟佛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석가모니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49년간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벽암록’, 상, 250). 잘 알려진 것처럼 석가모니는 자신이 처음 깨달음을 얻은 직후, 그 위없는 깨달음이 너무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서 남들에게 말하길 망설이는 장면을 ‘아함경’은 전하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제석천의 설득으로 그 깨달음을 전하기로 결심했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숫타니파타’, ‘아함경’에서부터 수많은 경전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전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설하지 않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심지어 석가모니불은 물론 “모든 부처님은 일찍이 세간에 나오지 않았으며 한 법도 남에게 말하지 않으셨다”고까지 한다.

부처님은 평생 한법도 설한 바 없고
유마는 문수 물음에 침묵으로 대답
말할 수 없는 것 앞에 침묵도 상투구

그렇다면 그 많은 경전은 대체 무엇인가? 지고의 도를 전할 수 없는 무용한 글자들 아닌가? 그건 “중생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근기에 따라서 병에 따라서 약과 처방을 하듯이 마침내 삼승십이분교가 만들어진 것이다.”(‘벽암록’, 상, 250) 석가모니가 평생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 함은 수많은 방편적인 불법을 설했지만, ‘불법 그 자체’라고 할 것, 지극한 도를 설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방편으로 설해진 것은 설한 조건을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다른 병을 가진 이에게 같은 약을 쓰는 것처럼 약 아닌 독이 되기 쉽다. 선가에서 경전에 대해 경계할 뿐 아니라, 선사들, 심지어 바로 자기 스승의 말조차 경계하도록 하는 것은, 지극한 도는 말로 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조건을 떠난 말은 바로 ‘죽은 말(死句)’이 된다면서 말을 떠나 ‘활구(活句)’를 참구하라는 것 또한 그러하다.

지극한 도는 설할 수 없다는 말은, 역으로 설함이 없는 침묵으로 지극한 도를 전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가령 ‘유마경’에서 유마(維摩) 거사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구별을 떠난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들어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자 문수사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일체의 법에 말도 없고 설명도 없으며 보여줌도 없고 알려줌도 없으며 모든 물음과 답변을 떠난 그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속을 넘어선 지극한 도란 일체의 말, 일체의 문답을 떠난 것이란 말이다. 유마거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이법문에 들어간다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문수사리의 물음에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 유명한 ‘유마의 침묵’이다. ‘벽암록’에서는 이를 ‘세존의 침묵’으로 바꾸어 하나의 공안으로 제시하고 있다(65칙).
외도(外道)가 세존께 여쭈었다.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 말없이 한참 계시니 외도가 찬탄하며 말하였다.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었습니다.”
외도가 떠난 후 아난(阿難)이 세존께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얻었기에 도에 들어갔다 말했습니까?”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

세존은 침묵으로 말할 수 없는 법을 전하고, 안목 있는 자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석가모니불이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역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지고의 법을 전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설하지 않건만 침묵으로 항상 지고의 법을 설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말없는 설법을, 지고의 법에 대한 설법을 듣고 있는가? 듣는다고 말한다면 세존도 놀랄 것이다. 그건 이미 지고의 도를 깨친 뒤에야 알게 되는 사실이다.

깨치지 못한 중생들에겐, 어쩔 수 없이 말로 전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말로 도를 전하고자 할 때,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말할 것인가? 아마도 이것이 선사들이 가장 고심했던 핵심적 난제였을 것 같다. 남전 보원이 백장산의 열반을 찾아갔을 때, 백장이 이렇게 물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여기서 백장 열반은 남전과 더불어 마조의 제자인 백장 회해가 아니다. ‘벽암록’에서는 마조의 제자인 백장 유정(惟政)이라고 하는데, 역시 마조의 제자인 남전과는 사형사제 관계가 되는 스님이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열반이 묻는 질문이다.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란 글자만으로 보자면 ‘자신은 알지만 남에게 전하지 않는 법’이란 뜻이니, 자신만의 비밀스런 법, 자신이 몸소 체득한 법을 뜻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남에게 전할 수 없는 ‘자기만의 체험’ 같은 게 되는데, 그걸 왜 알고자 하는지는 그만두고, 그렇게 되면 그거야말로 불법마저 ‘자기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게 되고 만다. 더구나 열반이 상대방인 남전에게 “그대가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을 묻는 게 아니라,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을 묻는 것이니, 이는 말할 수 없는 법, 말로 전할 수 없는 지고의 불법이 무어냐는 물음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남전은 의외로 순진하다 싶도록 답한다.
“있습니다.”
원오는 이리 답하는 것을 두고 ‘형편없다’, ‘멍청한 놈, 무슨 짓을 하느냐?’고 착어를 달았다. 물론 이 착어를 원오가 남전을 고지식하게 비난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빗나가고 만다. 곧이곧대로 답했다간 호되게 당하는 게 선사들의 문답이기에 하는 말일 게다. 어쨌건 열반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다시 묻는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외물(物)도 아니다’라오.”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이라고 스승인 마조는 말했지만, 사실 지고의 도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반대편에 있는 외물이나 중생 등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에 매인 이들을 부처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게 하고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했던 마조의 말에 ‘외물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나 더 덧붙여, ‘평상심’이란 답으로 내려갈 길도 막아버렸다. 요체는 지고의 도란 마음이든 부처든, 혹은 외물이든 중생이든 말로 명명되는 것 바깥에 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남전의 대답을 듣고 열반은 말한다.
“말해버렸군요.”

성인이 남에게 말해주지 않은, 아니 말해주지 못한 것을 물었는데, 말로 답을 했으니 애초에 물었던 것에서 벗어나 버린 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당착에 빠진 것이다. 뒤집어, 이런 거였다면 성인들이 설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남전이 그걸 모르고 답했을 리 없다. 게다가 열반 역시 마조의 제자니, 저 말을 모를 리 없음을 남전 또한 알고 있을 터이다. 이런 식으로 선사들이 던지는 것은 역으로 상대를 점검하려는 관문(‘미끼’)이라고 보아야 한다. 혹은 열반의 물음에 침묵으로 응수하거나 입을 막는 방식으로 답하리라는 흔한 예상을 뒤엎고 답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말을 해버렸지만, 남전으로선 몸을 돌릴 구멍이 있었다. ‘~이다’라고 답한 게 아니라 ‘~이 아니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한 게 아니라, 흔히들 하는 답을 부정한 것이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함정에 빠지는 궁지는 피해간 것이다. 남전은 자신에게 온 질문을 이제 상대방에게 되돌려준다.
“저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떠합니까?”

당신이라면 말할 수 없는 지고의 도를 말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열반은 스스로를 낮추며 피해간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닙니다. 설할 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답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선다면 결국 지고의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머물고 만다. 남들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남전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모르겠습니다(不會).”
선문답을 아는 이라면 이 말에서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라는 양무제의 질문에 달마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던 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달마가 흔한 의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저리 답한 게 아니다. 나라는 것, 실체 없는 그것,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니 모르겠다고 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전의 이 말은 성인이 말하지 않은 지고한 도에 대해 말한 것이 되는데, 이는 열반의 말에 응수해야 할 자리에서 앞서 했던 답을 수정하여 답하는 졸렬한 응답이 되고 만다. 남전은 그렇게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큰 선지식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는 열반의 말에 대해, 그렇다면 그 지고의 법과 만날 수 없게(不會) 되지 않느냐, 그걸 어찌 전하겠느냐면서 열반에게 한 방 날리는 말로 보아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서 침묵하거나 물러서는 것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이에 대해 백장 열반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말해버렸군요.”

무얼 너무 말했다는 것일까? 말할 수 없는 법에 대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말한 것조차 너무 말해버린 것이란 말일 게다. 물러서는 것을 비판하는 말에 한 걸음 더 물러서며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입장에서 아주 일관된 답이기는 하다. 그럼으로써 말할 수 없는 지고함을 지키며 남전의 공세를 받아넘기긴 했지만, 사실 그 지고의 도를 어찌 말할 것인가라는 데 대해선 답을 하지 못하는 게 된다.

그래서일 게다. 이에 대해 논평하며 설두(雪竇)는 “콧구멍은 얻었지만 입을 잃어버렸다”고 평한다. 콧구멍, 숨 쉬는 곳이니 그곳을 빼앗긴다 함은 치명상을 입는 것이다. 열반의 대답은 남전의 공세에 뒤로 물러서면서 급소를 방어하긴 했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을 못하는 처지에 빠진 것이니 ‘입을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다. ‘벽암록’에서 원오가, 선지식이 아니라며 내빼는 열반의 말에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 꼴을 보라.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는 노출되었다”고 하면서, “진흙 속에 가시를 숨겨” 빠져나가려 하지만 “그 정도로 나를”, 또한 남전을 “속일 수 있을까?”라고 착어를 단 것도 이런 의미일 것이고, “너무 말해버렸다”는 마지막 말에 대해 “설상가상이고 용두사미”라고 논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점에서 ‘말할 수 없는 법’이나 침묵마저 상투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밀고 들어간 남전의 기백은 실로 놀랍고도 멋지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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