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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전 율원장 도일 스님 두 번째 법문

  • 교계
  • 입력 2017.04.18 17:51
  • 수정 2017.04.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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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제 법문으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들이 한국불교 내에서 이슈가 되어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불교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간화선을 폄하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수행이든 추구하는 가치는 모두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시법평등 무유고하(是法平等 無有高下)’라고 했습니다. 불법은 모두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행하고 그것을 중생의 이익으로 돌려줄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간화선도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삶의 모습을 바로 짚어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런 뜻을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불교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부처님법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간화선을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화선을 할 때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 ‘무상’ ‘무아’에 부합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사선을 한다고 하면서 ‘고’ ‘무상’ ‘무아’라는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과 회통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참다운 수행이겠습니까? 부처님법과 동떨어진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님 말씀인지를 바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깨닫는 것은 개인의 일이고, 계율을 배우는 것은 전체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은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넘어 고매한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원만하고 자비스럽고 깊은 지혜를 동시에 갖추는 것이 온전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공부를 하신 분들도 자비로운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큰스님을 만날수록 서늘한 느낌이 듭니다. 가까이 다가가기에 멀고 겁이 납니다. 자비로움이 아니라 서릿발 같습니다. 수행하면 저렇게 무섭게 돼야 하는 걸까요. 저는 힘들고 삶에 지쳤을 때 큰스님을 보면 딱 안기고 싶고, 그 앞에서 펑펑 울어도 다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면 (부처님처럼) 그리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반대입니다. 보면 무섭습니다. 그래야 권위가 서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님은 절대 권위적인 분이 아니셨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불교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에 대한 답은 모두 부처님 법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승가는 승가답게 행동하고, 재가는 재가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출가한 사람들은 본래 출가한 목적이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만 추구하면 됩니다.

제가 어느 날 의사회에서 주최한 법회에서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의사들이 하는 말이 “스님들이 수행만 제대로 하면, 가난한 스님들은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절 때문에 싸우고, 권력 때문에 싸우고, 이런 것들을 위해 돈 뿌리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나서 돕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신심도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죠? 수행을 열심히 하는 가난한 스님을 보게 되면 십시일반 돈을 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게 우리 불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면서 자신만 잘 살겠다고 하면서 불법 닦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에는 승잔법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계율을 제정할 때 승단의 분열을 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법을 어기면 중징계를 주도록 했습니다. 승잔법 가운데 이간질을 해서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즘 선거를 해서 주지를 뽑는다든지, 방장을 뽑자고 하는 것도 모두 승가의 분쟁을 조장하는 일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선거를 주장하는 사람은 중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분쟁날 것을 대비해서 그 대안을 모두 마련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교의 여러 수행법 가운데에서 이것이 우선이라고 하는 모순된 생각을 갖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것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뭘 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단박에 깨친 그런 분이 있다면 육조혜능 스님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근기가 모두 같지 않고, 다 다른데 육조혜능 스님 같은 그런 분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가 육조혜능 스님 같이 갑자기 팍하고 한 소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석두(石頭)를 가진 사람이 ‘나는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부다 앉으면 한 소식 할 것처럼, 서울대에 들어갈 것처럼 앉아 있는 것입니다. 중국 선종사에서 큰 획을 그은 스님들은 선방 문고리를 잡지 않은 스님들이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발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안 빠진 것입니다.

어느 날 마조 스님이 좌선을 한다고 애를 쓰고 있었답니다. 그 모습을 본 스승 남악 스님이 “자네는 뭐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은 “도를 닦아서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악 스님은 갑자기 기왓장을 가져다가 갈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마조 스님이 “왜 기왓장을 가세요”라고 물었고, 이에 남악 스님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자 남악 스님은 “좌선한다고 부처가 되느냐”고 깨우침을 줬다고 합니다. 이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방에 간다는 형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보신문 댓글에서) 내가 선방에 가지 않아서 그렇게 말을 한다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3년 전 저는 송광사 율원에서 나왔습니다. 시력을 잃어서 책을 볼 수 없었고, 다른 것은 할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책을 볼 수 없는 것은 고통이었지만 저는 그동안 제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떠오른 의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조사어록을 떠올리고, 남방에서 배움을 가졌던 과정에서 품었던 의문점을 떠올리며 참구했습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제 필요에 의해서 좌선을 하게 된 것입니다. 3년간 아침에 일어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로지 좌선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선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한국불교는 계율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불교가 되살아 날 수 있는 길은 계율의 부활이라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이것은 선종의 부활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금의 대만불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젊은 스님들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 스님들은 불교적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계행을 철저히 행하면서 사람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덕성을 갖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의 노력으로 대만불교는 이제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정도로 불국토가 됐습니다.

불교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첫 걸음이 계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당신은 불교신자인데, 어떤 것을 삶의 지표로 삼느냐”고 물어볼 때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그것은 바로 오계여야 합니다. 오계는 불자들의 근본행동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대만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계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선원에서도 계율로 시작해야 합니다. 계가 없으면 정이 없고, 정이 없으면 혜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계는 반석이고, 정은 기둥이며, 혜는 지붕인 것입니다. 계정혜가 완전히 갖춰져야 비로소 튼튼한 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선만 하겠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공부이고, 수행이겠습니까? 설령 공부가 된다고 해도 완전한 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아야 수행이고, 공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부처님 법입니다.

어려운 어록이나 책을 많이 읽어서 여러분 삶에 도움이 되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에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 현실에서) 그것이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보살의 단계까지는 되어야 합니다. 유교에서는 이상적인 사람이 군자입니다. 보살은 군자를 뛰어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보살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물론 보살행을 하겠다는 그 대원력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계행을 우선 닦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오계를 바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계를 모두 실천하면 불교가 새롭게 발전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오계 가운데 불살생은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도인이 아니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계는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불교의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사는 것은 부처님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끼리, 중생끼리 서로 도와가며 요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욕망이 있어서 서로 질투와 시기가 생기고 비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을 줄이기 위해 부처님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그 마음을 극복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대스승으로, 혹은 부모처럼 여기고 존경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부처님께 답을 물어야 합니다. ‘무조건 이것 하면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이런 맹목적인 불교는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에 대해 답을 다 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안 볼 뿐입니다. 어느 하나의 이적, 어느 하나의 획일화된 것에 갇혀서 뛰어넘지 못할 뿐입니다. 이제 그런 방식을 뛰어넘을 때가 왔습니다. 스님으로서 사명이 무엇인지, 재가불자로서의 사명이 무엇인지 재고할 때가 왔습니다. 이런 숙제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을 때 우리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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