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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곤란을 해결하는 방법 ③

“남과 힘 겨루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 적이 없습니다”

▲ 자연재해 피해 지역에서 난민 어린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불광산의 비구니스님.  대만 불광산 제공

"불광산의 어려움은 모두 부처님께서 해결해 주셨고 신도들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잠시나마 인간세상의 현존하는 안락을 누리고 있는데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것 외에 어디 ‘어려움’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사문제 역시 제가 불광산을 개산(開山)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중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일부 출가한 남성들이나 부모들이 자신의 어린 자녀를 불광산에 보내와서 사미가 되도록 하였는데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되면 필히 군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군대를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창건 초기인지라 필히 ‘울력’으로 힘든 일을 하기도 했는데 어떤 젊은이는 힘든 일을 참지 못하고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청년들은 소박한 음식과 불가의 청규를 지켜야 하는 생활이 싫다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부모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경우가 많지는 않았지만 한 교단 안에 이러한 사람이 몇 명만 되어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전체 교단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중은 강철처럼 상주하는 존재고 승려는 흘러가는 물과 같다(鐵打常住流水僧)”라고 하듯이 신앙은 자유로운 것이므로 떠나는 사람을 잡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막지 않듯이 이 또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사람을 보내 그들의 짐을 옮겨주고 기차표도 사서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의 부모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제가 대신해서 부모님께 사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출가수행의 길은 필히 출가의 성품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출가의 성품이 없는 사람을 교단에 있게 하면 억지로 머릿수만 채우는 것입니다. 교단에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사문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대부분 당사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인연법에 따르면서 그 사람에게 맞는 위치에 안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모두가 무탈합니다. 다들 편안하고 탈이 없으면 바로 곤란함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그들이 사회로 돌아가더라도 조금이나마 불법의 기초를 갖추었고 조금이나마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배웠으니 비록 일생일대의 사업성취를 하지 못하더라도 저는 그들에게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도덕관념을 심어주었으니 제가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02년 갓 지은 일본 본서사(本栖寺)에 머물고 있을 때 대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제가 건축한 옥불루에 불이 나서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화에서 저는 얼른 소방대를 불러서 진화를 하도록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만에서 다시 전화가 왔는데 화재를 진화할 수 없는 것이 창문이나 출입문을 열면 불길이 더 퍼지기 때문에 문이 닫힌 채로 그냥 타게 두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화재가 난 곳은 경전도서를 보관하던 창고라서 타버린 경전은 다시 인쇄하면 그만이고 불에 탄 건물은 새로 중건하면 그만이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화재를 보면서도 소방대원들은 왜 진화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소방차를 기증한 적도 있고 소방대에 기부금을 보내기도 했었는데 제가 소방대원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어찌하여 두고 보기만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경제적인 손실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법을 펼치면서 모든 생명에 도움을 주고자 하고 있고 여전히 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열정 역시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 이 화재가 우리들의 신심을 태워버리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불광산 제자가 조심성 없이 산 아래 길가 옆 농토에 임시로 양철집 창고를 지어 탁자와 의자, 서적 등 잡동사니를 넣어두었는데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전소되었습니다. 잡동사니를 쌓아둔 창고라서 본래 큰일이 아니었고 빠르게 진압이 되어 이웃 농토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신문에는 “불광산이 화재로 불탔다”라고 대문짝만하게 실려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불광산에 불이 나야 그 사람들은 기쁘고 좋았을까요? 우리들은 사회로부터 공정하지 못한 중상모략과 짓밟힘을 받았습니다. 사회의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아마도 우리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마음에 불만이 있더라도 우리는 의기소침하지 않았고 뜻을 잃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 대중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창건 초에 경험부족으로 인해 타설(打設)해 놓은 콘크리트가 퍼붓는 큰비에 쓸려내려 갔어도 우리는 아무 상관없이 새로 작업을 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완공을 앞둔 방생지 제방이 쏟아내리는 물길에 휩쓸러 무너졌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더 튼튼하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꾸준하게 노력하고 극복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어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리심을 내고 원력을 굳게 세운다(發菩提心,立堅固願)”라는 보살의 서원처럼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단련시키는 기회로 삼고 우리를 발전하게 하는 인연으로 삼으면 그만입니다.

대만은 민심이 순수하고 민간종교가 보편적인 곳으로 불교 역시 대만에서 민간종교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에서 불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정성공’의 어머니가 타이난에 개원사를 세웠는데 가장 오래된 사찰입니다. 복건의 수벽(樹璧) 선사가 미주(湄洲) 마조(?祖) 상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건너와 북항(北港)에 조천궁(朝天宮)을 세우고 타이베이 맹갑(艋舺) 용산사에 관세음보살과 청수조사(淸水祖師) 등등을 모셨는데 대만의 신을 모시는 도교의 시작은 모두 불교와 인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교에서도 불교사찰에 대해 지극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춥니다. 불교회에서는 종교법에 대해서 정부와 교섭하며 신도교 사당의 이익도 보호하고 있기에 모두들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불교사에 역사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고 대만을 국제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중대한 일이 있으니 모두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불광산에서 세계불교도우의회, 세계불교걸출부녀대회 등이 몇 번이나 연속해서 개최되었습니다. 불교와 바티칸 추기경의 대화도 불광산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중국 시안 법문사의 불지사리를 대만으로 모셔 친견법회를 봉해했는데 수백만 인파가 참배 예경하여 양안 종교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습니다.

부처님 치아사리가 대만에 도착하였을 때 식견이 뛰어난 행정원장 ‘소만장(蕭萬長)’ 선생은 불타기념관을 지어 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를 도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해 주었습니다. 저는 만약 산이 많은 대만에서 평지를 찾아 건축하고자 하면 장래에 주차 공간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의 답사를 통해 결국은 세계 1000곳의 사찰과 100만명의 인사들이 함께 마음을 모으고 대중의 결의를 통해 불광산 인근에 있는 경천신(擎天神) 회사 자리에 불타기념관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완공 이후 불타기념관은 대만에서 가장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관광지이자 참배공간의 종교성지가 되었습니다. 매년 1300만여명의 관람객들이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고 있습니다. 관광국에서는 불타기념관이 가오슝의 경제발전을 움직이고 있고 대만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지역의 일부 민의대표들은 의회질의에서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게 되고 시간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상으로 불광산은 인근 농민으로부터 땅을 임대하여 차량을 1000대 이상 주차할 수 있습니다. 불광산은 국유지를 조금도 점유하지 않았으며 인근의 토지 주인들과도 조금의 다툼이 없습니다. 불광산의 모든 건축물은 합법적이며 설사 약간의 불법건축행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지 절차상의 불법건축행위였지 실질적인 불법건축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수자원국과 일부 관료들은 우리들이 중점 건축물 이외에 부대시설물의 건축허가가 아직 수속 단계에 있거나 허가증이 미처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을 하였다며 몇 번이나 벌금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호주와 미국, 중국대륙에서도 똑같이 사찰을 건축하였지만 종교단체는 모두 현지 정부의 도움과 존중을 받았는데 대만에서만 유별나게 정부의 벌금통지서를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정부의 문제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발심에 잘못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 어려움이 아닌 어려움이라고 한다면 근간에 발생한 재해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면 921대지진(1999년 대만 중부에서 일어난 진도 7.3의 대지진. 역자 주), 2009년 모라곳 태풍재해,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천대지진, 일본 동북대지진, 뉴질랜드 지진, 말레이시아 동부해안 대홍수, 최근 네팔 대지진 등 세계의 재난지역에 우리는 구호 의료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와 도서관을 지어서 기증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겨울철 빈민봉사와 독거노인 음식배달과 구급차와 휠체어를 필요한 사람과 단체에 기증하고, 책을 구입하고 기증받아서 환경이 열악한 지역과 학교에 이동도서관을 보내서 전 국민이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르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어려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광산이 상업화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습니다. 사실 불광산은 “불법이 아닌 일은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갖고 있기에 돈을 버는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불학원을 세웠으니 학생들을 입히고 먹여야 하고 단기출가와 여름캠프 등등의 활동에는 필히 적지 않은 경비를 필요로 합니다. 심지어 공익을 추구하는 TV방송국과 도서출판, 잡지, 월간 출판물 등 모두가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수입을 내는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선한 마음을 가진 수많은 신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회와 인심의 정화에 이로움이 된다면 우리는 “하루하루가 어려워도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기꺼이 원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해 나아갈 것”입니다.

“가는 것은 가도록 두고 오는 것은 저절로 온다”는 말처럼 불가에서는 인과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 인연과보 속에서 우리는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빈승에게 묻는다면 어려움을 처리하는 원칙으로 “절대로 남들과 힘을 겨루거나 싸우지 않으며 남을 욕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인정에 부합되고 이치에 맞도록 신경 쓴다면 시시비비에 휘말리지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도 않는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법이 있으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믿기에 저에게는 달리 어려움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광산의 어려움은 모두 부처님께서 해결해 주셨고 신도들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잠시나마 인간세상의 현존하는 안락을 누리고 있는데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것 외에 어디 ‘어려움’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앞으로 누군가 다시 저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냐고 묻는다면 빈승은 그분께 함께 해결하자고 부탁할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3호 / 2017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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