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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선물 같은 인생

기자명 조정육

‘일상이 귀하다’는 진리 알면 이곳이 꽃자리

▲ 이민한, ‘산그림자-기다림’, 210×87cm,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3 :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인생이라는 큰 선물을 받고 충분히 행복해보라는 의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선물인지 몸소 체험해보라는 의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혼자 가면 심심할 테니 함께할 남편도 주고 자식도 주고 친구도 주고 스승도 준 것은 아닐까.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지치면 가끔씩은 물가에 앉아 물속에 비친 산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삶을 음미하는 것. 그 안에 삶의 충만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병원에서 퇴원했다. 보름 동안 집을 비운 사이 힘들었을까. 남편이 감기에 걸려 끙끙 앓는다. 아직 내 몸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향한다. 또 다시 주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부엌은, 라면도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남편이 보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듯하다. 설거지통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가득하다. 입원하기 전에 사다 둔 햇반 한 박스가 거의 다 비어있다. 혼자 식탁에 앉아 햇반을 먹었을 남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내 손으로 지은 밥을 먹여야겠다. 장을 본 지가 오래 되었으니 급한 대로 집에 있는 재료로 점심밥을 한다. 잡곡을 불려 밥을 짓고 다시물을 내어 김치찌개를 끓인다. 파래김을 굽고 양념장을 만든다. 보너스로 달걀프라이를 해 밥 위에 올린다. 소박한 상을 차린 후 오랜만에 남편과 마주 앉아 뜨거운 밥을 함께 먹는다. 이게 사람 사는 행복이구나. 밥을 먹는 내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보름 동안 병원 입원한 뒤
집서 남편과 밥 함께 먹고
저녁엔 장보러 마트에 가
평범한 일상이 바로 행복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찹쌀을 물에 불린다. 팥도 씻어서 뭉근하게 삶는다. 남편이 좋아하는 찰밥을 만들기 위해서다. 오늘 재료를 준비하면 내일이면 맛있는 찰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식사 준비는 끝냈으니 이제부터는 집안 청소다. 집에 오니 모든 일을 전부 내 손으로 해야 한다. 그래도 좋다. 내가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병원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편했다. 병원에서 전부 알아서 해 주니 나는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자고 쉬면 그만이었다. 아침 먹으면 점심, 점심 먹으면 저녁을 걱정하던 집에서의 시간은 멈춰졌다. 매번 똑같은 재료만 진열된 마트에 가서 끼니마다 무슨 반찬을 할까 고민하던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내 몸도 아파서 힘든데 식사까지 준비해야 하는 주부의 괴로움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병원에서 돌봐주는 대로 내 몸만 치료하면 충분했다. 병원에서 나온 식사도 훌륭했다. 어쩌면 이렇게 창조적인 식단을 짤 수 있을까. 삼시세끼 매 끼니마다 반찬이 달랐다.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었다. 방 청소도 목욕탕 청소도 모두 병원에서 알아서 해주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이 생활이 왠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내가 그렇게도 귀찮게 생각했던 일상이 새록새록 그리웠다. 허름하지만 안온한 내 터전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나 자신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편안한 병원이 불편하고, 편안하지 않은 집이 그리운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퇴원할 때쯤 그 이유를 알았다. 내 손으로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설령 그 행위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충만한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집에 있을 때는 왜 그 이유를 몰랐을까. 내가 태어난 목적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선물을 받고 충분히 행복해보라는 의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선물인지 몸소 체험해보라는 의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혼자 가면 심심할 테니 함께할 남편도 주고 자식도 주고 친구도 주고 스승도 준 것은 아닐까. 어떤 인생이든 그 선물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최적화된 삶이라는 것을 모르니 불평하고 허전해한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안타깝게 시간을 낭비하며 산 것을 깨닫고 후회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거창한 일을 하는 것만이 인생의 선물이 아니다. 하찮게 생각하는 일상도 인생의 선물이다. 그 진리를 알게 되면 내가 서 있는 곳이 꽃자리가 된다.

저녁밥을 먹고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왔다. 찰밥에 넣을 밤과 은행을 사기 위해서다.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생각나 우산도 챙겼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쯤 가면 대형마트가 있다. 저녁밥을 먹은 후에 장보러 간 이유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밥을 먹은 직후에는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움직여야지 바로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없다. 무럭무럭 부풀어 오르는 허리 살이 걱정되기도 하거니와 일단 소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럴 때 산책 삼아 장보기를 하면 운동도 되고 반찬거리도 살 수 있어 좋다. 필요한 재료는 주로 동네 슈퍼를 이용하지만 밤과 은행은 대형마트에서 파는 것이 양도 많고 싱싱하다. 그곳에서는 매일매일 겉껍질만 거칠게 벗긴 밤을 봉지에 담아서 판다. 밤은 겉껍질을 벗기기가 힘들기 때문에 초벌로 깎아놓은 밤을 사다 속껍질만 다듬으면 고생하지 않아도 맛있는 밤밥을 할 수 있다. 바로 깎은 밤은 양잿물에 씻은 듯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진공포장된 밤과는 차원이 다르다. 밤 한 봉지에 5800원, 은행 한 봉지에 6800원이다. 싸다. 이 정도 양이면 찰밥을 두 번 해도 충분하다. 나한테 5800원을 줄 테니 밤을 줍고 세척하고 포장해달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겉껍질까지 벗겨주지 않은가. 은행은 더하다. 그 냄새나는 열매를 주워서 씻고 껍질을 깨서 알맹이를 꺼내야 한다. 내친 김에 아욱도 두 단 산다. 마트를 나서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나는 준비해 간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느라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마을버스가 들어온다. 심지어 퇴근시간인데도 빈자리까지 남아 있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저문다. 내일도 오늘 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펼쳐 본 오늘은 어제까지의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다. 이렇게 평생 선물을 펼치고 살다 인생을 마치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노래했듯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지상에서의 여행이 아름다웠더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날마다 좋은 날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93호 / 2017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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